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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삼국시대와 불교 전래

삼국은 어느 나라인가요?

시작부터 뭐 이런 싱거운 질문을 하는가, 고구려·백제·신라지.” 맞습니다. 우리는 삼국을 고구려·백제·신라라고 말합니다. ‘백제·고구려·신라신라·백제·고구려라고 하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고구려·백제·신라라고 말하는 것은 은연중에 고구려를 삼국 가운데 최고로 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 넓다는 만주를 호령하던 고구려의 기상을 우리는 여전히 동경합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건국한 나라는 어디일까요?

당연히, 고구려!”가 아닙니다. 신라인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57년에 신라가 세워졌습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됐습니다. 대략 20년 간격으로 신라, 고구려, 백제가 등장한 것입니다.

삼국사기를 쓴 이가 김부식이고 그는 경주김씨이고 또 신라를 정통으로 보는 사람이니까, 신라가 제일 먼저 세워진 것으로 썼겠지.” 그렇지 않아요. 고구려를 중시했던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에도 삼국 중 신라가 가장 일찍 건국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럼, 삼국 가운데 제일 국력이 강했던 나라는 어디일까요?

 

 

적석사 억새

 

이번에는 고구려가 답이 될 겁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항상 강했던 것은 아닙니다. 때에 따라 달랐습니다. 백제가 고구려를 능가할 때가 있었고 신라가 고구려를 압도할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최후의 승자는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입니다.

그렇다면, 강화는 삼국시대에 어느 나라 영토였을까요?

고구려! 백제! 신라! , 모두 정답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지요. 대략 4세기부터 삼국이 크게 충돌합니다. 이들이 저마다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다투던 곳이 한강 유역이라고 교과서는 말합니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나라가 삼국 중 가장 강한 나라였습니다. 강화는 한강 유역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강화를 확보한 나라가 최강국이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서기 300년대, 그러니까 4세기에 가장 강성했던 나라가 백제입니다. 중국 요서 지역까지 진출하여 백제 영역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당시 임금이 근초고왕이지요. 근초고왕은 고구려 평양성에도 쳐들어가 승리합니다. 이때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합니다. 그만큼 백제가 강했습니다. 4세기까지 강화는 백제 땅이었습니다. 이때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5세기는 그야말로 고구려의 시대입니다.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활동한 때입니다. 백제와 신라는 쪼그라듭니다. 이때 강화는 고구려 영토가 됩니다. 고구려 당시 강화는 혈구(穴口)로 불렸습니다. 지금도 혈구라는 지명이 살아 있지요? 그렇습니다. 혈구산!

광개토왕은 주로 북방 지역으로 영토를 늘렸습니다만, 남쪽으로도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군을 동원하기도 했지요. 당시 뜨거웠던 전투지가 관미성(關彌城)입니다. 지키려는 백제도, 빼앗으려는 고구려도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삼국사기는 광개토왕이 39210월에 백제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바닷물이 둘러싸고 있어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라고 썼습니다. 고구려에 크게 당한 백제, 그래도 관미성만은 꼭 되찾으려고 합니다. 393년에 백제 아신왕이 진무라는 이름의 장군에게 명합니다.

관미성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요새이다. 그 땅이 지금은 고구려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것을 과인은 애통해하니, 그대는 응당 이 점에 마음을 기울여, 이 땅을 빼앗긴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진무가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관미성을 쳤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백제는 관미성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관미성이 지금 어디인지 어느 사료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몇 곳을 추정합니다. 파주 오두산성, 예성강 하구, 개성 주변, 개풍군 백마산성이 말해지고 또 강화 하점면 봉천산, 교동도 화개산도 언급됩니다. 강화 본섬 전체를 관미성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관미성이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바닷물이 둘러싸고있다는 삼국사기기록으로 볼 때 강화 지역에 관미성이 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나

그러게요. 이제 고구려가 지기 시작합니다. 6세기는 고구려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라는 질풍노도를 견뎌내지 못하고 위축됩니다. 신라 진흥왕이 드디어 한강 유역을 차지합니다. 강화는 신라 땅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강화는 대략 4세기까지 백제, 5세기에 고구려, 6세기부터 신라의 영토였습니다. 갑비고차, 혈구로 불렸던 강화의 지명이 통일신라 때는 해구(海口)가 됩니다.

그러면 강화가 강화로 불린 건 도대체 언제부터인 거야?

고려시대부터입니다. 고려 초에 처음으로 강화라는 지명이 등장합니다. 왜 강화(江華)라고 했는지, ‘강화의 뜻이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관련하여 이런저런 말들이 퍼져있습니다만, 그냥 추정이에요. 명확한 근거가 찾아지지 않습니다.

 

<강화의 현존 사찰 창건 시기>

사찰명 창건 시기
전등사 고구려 소수림왕 11(381)
보문사 신라 선덕여왕 4(635)
정수사 신라 선덕여왕 8(639)
청련사, 백련사, 적석사 고구려 장수왕 4(416)

 

 

보문사 향나무 동자승 인형

 

삼국이 국력을 다지는 과정에서 펼쳤던 정책 가운데 하나가 불교 공인입니다. 불교는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데 크게 기여했던 종교입니다. 강화는 다른 지역보다 더 일찍 불교가 수용됐을 겁니다. 지금 강화의 사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창건된 것으로 전합니다.

전등사 창건 연대 381! 전등본말사지에 이렇게 나옵니다. 지금 전등사를 천년고찰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1600년이 넘는 고찰입니다. 전등본말사지기록에 따르면, 현존하는 전국 사찰 가운데 창건 연대가 가장 앞서는, 그러니까 가장 오래된 사찰이 바로 전등사입니다.

청련사 등의 창건 전설은 너무 거창하지 않아서 더 정겹게 느껴집니다. 오색 연꽃 던져 떨어진 곳에 다섯 절을 지었다는 유명한 전설이 여러 사료에 전하는데, 그 내용이 적석사비에도 실려있습니다. 적석사비는 고려산 적석사 주차장 옆, 비각 안에 있어요. 1714(숙종 40)에 세운 이 비석의 공식 이름은 적석사 사적비(積石寺 事蹟碑)’입니다. 강화금석문집(강화문화원, 2006)에 실린 번역본 일부를 옮깁니다.

 

옛날 천축조사가 일찍이 이 산에 주석하면서 절을 창건하고 부처를 받들어 모셨다고 한다. … 여러 승려가 또 말하기를 “옛날 조사가 주석하던 때에, 다섯 가지 색의 연꽃을 던져 오방의 산기슭에 떨어지니 바로 다섯 연꽃의 땅이었다. 그곳에 모두 절을 짓고 연꽃 색깔에 따라 절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이 산도 오련산이라 일컫고, 이 절도 적련(赤蓮)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고려산에서 연꽃을 날린 승려가 천축조사라고 했습니다. 천축조사는 이름이 아니고요, 천축국(인도)의 승려라는 뜻입니다. 고려산의 원래 이름이 오련산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네요. 적련사(赤蓮寺)가 나중에 이름을 바꿔 적석사(積石寺)가 되었습니다.

천축조사가 던진 오색 연꽃은 한 연못에 핀 것일까요? 각각 다른 연못에 핀 것일까요?

오랜 세월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은 조금씩 변용되어 여러 가지 이야기로 기억되기 마련입니다. 정답 하나만 있는 게 아니지요. 일반적으로 한 연못에 다섯 색깔 연꽃이 모두 핀 것으로 말해집니다. 그래서 오련지(五蓮池)라고 합니다. 하지만, 김노진이 지은 강화부지(1783)에는 다섯 개 연못에 각각 핀 다섯 색깔 연꽃을 천축조사가 따서 하늘에 날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오련(五蓮)은 무슨 색깔일까요?

18세기 중엽에 나온 여지도서 강도부지와 박헌용이 편찬한 속수증보강도지(1932)적련, 청련, 백련, 흑련, 황련이 오련이라고 나옵니다. 조금 다른 내용도 전해지기는 합니다만, 오련을 적련, 청련, 백련, 흑련, 황련으로 보는 것이 일종의 정설입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 때 오련산(고려산)에 세워진 사찰이 적련사(적석사), 청련사, 백련사, 흑련사, 황련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고려산에 있는 사찰은 적석사, 백련사, 청련사입니다.

다음 호에서 불교와 강화의 사찰 이야기를 조금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강화투데이35(2023.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