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임금은 모두 27명인데, 이들 가운데 우리 강화에 왔던 임금은 누구누구일까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제가 확인해 본 이는 일단 태종, 연산군, 광해군, 인조, 효종, 영조, 철종 정도입니다. 인조 빼고 나머지 임금들은 즉위하기 전에 왔거나 폐위되고 나서 강화 땅을 밟았습니다.
태종(이방원)이 임금 되기 전 어느 해엔가 강화에 왔습니다. 《세종실록》에, 임금들이 해마다 봄·가을에 대언(승지)을 마리산 참성단에 보내 초제를 올리게 했는데, 이방원도 대언 신분으로 왔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 귀양 왔습니다. 연산군은 교동에 갇힌 지 불과 2개월 만에, 마누라가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묘를 그대로 교동에 썼는데 8년 있다가 지금의 서울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장했습니다.
광해군은 강화읍내에 유배됐는데 아마도 강화초등학교 아래 동쪽 어디쯤 갇혔던 것 같습니다. 교동 등으로 옮겨지다가 제주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얼추 따져 보니 강화읍과 내가면 외포리에서 14년여, 교동에서 수개월, 제주도에서 4년 정도 귀양살이했습니다. 광해군의 유배 기간은 다해서 19년입니다. 연산군에 비하면 상당히 길었지요. 묘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습니다. 폐위된 임금의 무덤은 왕릉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묘라고 합니다.
인조는 임금으로 있을 때 왔습니다. 피란입니다. 임진왜란 끝나고 약 30년 만에 큰 전쟁이 또 터집니다. 후금이 쳐들어온 이 전쟁을 정묘호란이라고 합니다. 그때 인조와 조정은 강화로 와서 무사히 위기를 넘깁니다. 인조는 연미정에서 가서 조선 수군의 훈련을 점검하고 북산에 올라 적의 침략 가능성을 따져 보기도 했습니다.
전쟁 끝나 다행이다 싶었는데 10년 만에 또 전쟁, 이번에는 청나라가 쳐들어온 병자호란입니다. 후금과 청나라는 사실상 같은 나라입니다. 후금이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꾼 겁니다. 인조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 다시 강화도 피란입니다. ‘내 팔자도 참, 거시기 허네.’ 아마 인조가 그랬을 것 같습니다.
임금 행렬이 강화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청나라 군대가 어느새 내려와 강화 가는 길목을 위협하고 있는 겁니다. 큰일 났습니다. 최명길이 청군 진영에 가서 이런 말 저런 말 하면서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인조는 겨우 남한산성으로 피했습니다.
그때 강화에 김상용이 있었습니다. 소현세자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봉림대군이 있었습니다. 봉림대군이 인조를 이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효종입니다. 강화가 청군에게 점령됩니다. 봉림대군은 그 과정을 직접 보고 겪었습니다. 그래서 즉위하고 나서 강화를 지키려고 초지진, 광성보 등을 세우는 겁니다.
청군이 강화로 쳐들어올 때, 죽자! 맘먹고 막았으면 충분히 지킬 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강화를 지킬 책임자들인 검찰사 김경징과 강화유수 장신은 일등으로 도망갔습니다. 특히 바다에서 수군을 지휘하던 장신이 밉습니다. 그래도 황선신·강흥업·구원일 등이 조선의 자존심, 강화의 자존심을 지켜주었습니다.
김상용, 소현세자빈, 봉림대군은 어떻게 강화에 올 수 있었던 걸까요? 왕실과 조정의 먼 길 행차 때는 다 함께 움직이는 게 아니라 1진, 2진 나눠서 출발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정묘호란 때도 그랬습니다. 임금은 2진입니다. 왕실과 궁궐 여인들 그리고 신하들 가운데 아프거나 나이가 많은 이들이 1진으로, 임금보다 먼저 출발합니다. 노약자와 여인에 대한 배려인 셈이지요. 동시에 출발하면 뒤에 처지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먼저 출발한 김상용 등이 강화에 들어와 있던 것입니다.
영조도 즉위 전에 강화에 왔습니다. 전등사 경내에 있는 정족산사고에 왔습니다. 정족산사고 안에 건물이 둘인데 하나는 장사각, 하나는 선원보각입니다. 장사각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선원보각에는 왕실 족보인 선원록을 보관합니다. 영조가 연잉군으로 불리던 숙종 때 왕실 족보를 가지고 왔었습니다(《역주 심도기행》).
‘정조 이산’, ‘옷소매 붉은 끝동’ 이런 드라마로 우리에게 더 친숙해진 정조. 인터넷으로 제공되는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을 보다가 정조가 강화에 왔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아! 정조도 왔었구나.’ 그런데 왠지 찜찜해서 원문을 확인해보니, 아니었습니다. 번역자의 실수로 정조가 한강에 나갔던 걸 강화도로 잘못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정조는 강화에 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 이제 철종입니다.
제 첫 직장이 경남 마산중앙고등학교였습니다. 남한 땅 제일 북쪽 강화에서 제일 남쪽 마산으로 갔는데, 가자마자 별명이 생겼어요. 강화도령! 강화에서 왔다고 하니까 선생님들이 그냥 다 강화도령이라고 부르더군요. 아, ‘강화도령’이 유명하긴 유명하구나. 그때 알았습니다.
강화도령은 철종 이원범의 별명입니다. 강화에서 강화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게 아닙니다. 굳이 도령으로 불러야 한다면, 한양에서 왔으니까, 한양도령이라 불러야 말이 되지요. 저도 강화에서는 한 번도 강화도령이라고 불린 적이 없습니다. 즉위 무렵부터 한양 사람들이 원범을 강화도령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원범은 강화에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한양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14살에 강화에 귀양 와서 살다가 19살에, 별안간, 임금 되어 강화를 떠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반역을 꾀했다고 해요. 헌종 임금을 내몰고 원범의 형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원범의 형은 죽임을 당했고 원범은 귀양 오게 됐던 겁니다. 처음에는 교동으로 유배됐는데 대략 스무날 뒤에 지금의 강화읍내로 옮겨집니다. 유배 살던 허름한 초가는 철종이 임금 된 뒤에 새로 지어 ‘용흥궁’이 되었습니다.
원범이 철종 되는 이야기는 일찍부터 극으로 만들어져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1963년에 라디오 연속극 ‘강화도령’이 나왔고 이어서 영화 ‘강화도령’도 나왔습니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는 TBC(지금 KBS2)에서 방영된 사극, ‘임금님의 첫사랑’이 아주 유명했습니다. 저도 ‘임금님의 첫사랑’ 보던 기억이 납니다.
원범을 주인공으로 한 연속극이나 영화는 재밌었습니다. 사람들이 아주 좋아했지요. 하지만 시청자들에게 철종에 대한 왜곡된 기억을 갖게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상식처럼 기억하는 철종의 모습 대개가 사실은, 사실이 아닙니다. 강화에서 농사꾼 또는 나무꾼으로 살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강화투데이> 제28호(2022.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