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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敎

김용택 시인과 전교조

십년이 더 지났네. 2011년에 전교조에서 나오는 교육신문 <교육희망>에 김용택 시인의 글이 실린 후그에 대한 반박의 글이 다시 실렸다. 비교해 읽어보면서 여러모로 착잡했다. 그때 블로그에 저장했던 것을 여기 옮긴다. 2023년 3월, 오늘에도 여전히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희망칼럼]한심한 당신들의 동지

김용택/ 시인

 

선생 38, 학교를 그만둔지 3,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이제야 전교조 관계 신문으로부터 난생 처음 청탁을 받았다. 감개가 무량(?)하다. 이런 신문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러이러한 신문이라고 청탁자의 설명을 듣고 도대체 어떤 신문인가 여기 저기 찾아보았다.

나는 전교조란 말에 반감이 있다. 강연 청탁전화할 때 지나치게 뻣뻣하고 경직되어 있고, 불친절하다. 일방적이다. 놀랍게도 전교조가 아직도 우리 사회 속에서 도덕적으로 존경받고 심정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줄 안다. 무슨 특별한 존경을 받고 사는 선택 된 조직인 줄 안다. 그들이 부르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어야 하는 줄 안다. 물론 그러던 시절이 있었다. 전교조 교사라면 택시 운전사들이 차비도 안 받았다. 그 때를 생각해 보라. 강연료를 일방적으로 정한다. 나의 의견을 말하면 교과서에 실린 시인이 돈을 따진다고 몰아 부친다. 자기들 말을 안 들으면 이제 한물 간 시대착오적인 가치의 잣대를 들이댄다. 오래 전 일이다. 전교조 사무실로 강연을 간 적이 있었다. 나는 정말 놀랐다. 창고도 이런 창고가 없었다. 복도와 사무실 구석구석에 쌓인 때 지난 유인물들을 보며 나는 경악했다. 저 버려진 유인물들이 내 회비로 만든 것이 아닌가. 사무실은 더 했다. 거기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하나 같이 얼굴들은 무심하고 경직되어 있었다. 이러고도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정리 정돈 하라고 말을 한단 말인가. 나는 평생 전교조 회비를 내고 살았다. 그 돈이 아까웠다. 그렇게 교육에 온몸을 바친 사람들이 어느 때 떡하니 교장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았다. 어떻게 하든지 한자리 차고앉으려는 그들을 바라 볼 때 나는 심한 배신감과 인간적인 환멸을 느꼈다. 진보적인 교육감이 당선 되자 그 권력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교사들이 늘었다. 곤혹스럽다.

 

선생을 하면서 진정으로 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전교조에서 만났었다. 오래 전 일이다. 교육을, 아이들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정으로 고민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날 때마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이런 교사들도 있구나,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고 장학사가 되려는 교사들이 아닌, 진짜 아이들을 사랑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걱정하는 교사들이 있구나,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내 곁에 있던 교사들이 해직될 때 나는 사는 것이 무서워 해직되지 않았다. 나는 괴로웠다. 내 교사 생활에 부채가 있다면 평생 아이들에게 잘못한 일과 그 일이다.

교사가 위대할 수 있는 것은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기 때문이다.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찬 불편한 얼굴을 거두어 들여라. 반성하라, 마음을 문을 열어라. 부드럽고 착하고 선량하고 정답고 선하고 따사로운 사랑으로 빛나는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 달라. 그것이 교사로서의 긍지와 그 권위와 위엄을 지키는 일이다. 이 너절한 세상 속에 인간을 지키려는 큰 사랑의 교육이 있어야 하고 교육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려는,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이 있어야 한다. 한심하게도 나는 평생 당신들의 동지였다.

2011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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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회원'이었던 김용택 시인에게

59일자 칼럼 '한심한 당신들의 동지'를 읽고

김영진/전북 군산 영광여고

 

전교조신문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단다. 그리고 그 신문으로부터 처음 원고 청탁을 받았단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전교조 조합원 모두가 받아보는 전교조 기관지를 그는 어찌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을까? 전교조 '조합비'를 내는 조합원이 아니라 전교조 '회비'를 내는 회원이라서 그랬나?(그가 조합비가 아닌 회비를 내고 산 걸 보면 그에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친목회였나 보다.) 그런 그에게 누가, 왜 청탁씩이나 했을까?

전직 교사이자 시인이기도 한 그는 이 너절한 세상 속에 인간을 지키려는 큰 사랑의 교육이 있어야 하고 교육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함이 있어야 한다고 일갈한다. 참 시인다운 말씀이다. 그러나 나는 교육을 지키고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의 현장에서 단 한 번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우리 교육이 시장판으로 전락하는 걸 막기 위한 싸움의 현장에 시인은 얼굴 한 번 보여준 적 없었다. 전교조가 위기에 처해도 우리 '회원'은 늘 침묵했다. 그런 그가 교직을 그만둔 뒤 3년이 흐른 시점에 전교조가 만드는 신문에 뜬금없이 "한심하게도 나는 평생 당신들의 동지였다"고 사랑 고백을 해놓으니 난감하다.

교과서에 실린 시인이 돈을 따진다고 누가 몰아붙였을까?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아주는 '섬진강 시인'에게 그런 무례를 범했을까? 궁금증은 잠시 덮어두고 그가 말하는, '일방적으로 정하는 강연료'라는 지적에 대해 변명해야 할 것 같다. 현재 전교조는 외부 강사를 초청할 때 강연료로 20만 원을 드리고 있다. 전교조 내부 강사에게는 강연료가 지급되지 않는다. 교과서에 실린 시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내노라하는 분들 모두 강연료로 그것 밖에 드리지 못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강연료가 적어서 강연을 못 하겠다는 분을 나는 아직 뵌 적이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강연 요청할 때 지나치게 뻣뻣하고 불친절했다면 그건 고칠 일이겠다. 전교조 사무실에 근무하는 전임자들의 얼굴이 무심하고 경직되어 있다는 지적도 새겨들을 말이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했다. 그들의 고된 업무와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잘 알기에 말을 못 할 따름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정으로 고민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날 때마다 그는 가슴이 뛰었다고 한다. 그렇게 교육에 온몸을 바친 사람들이 어느 때 교장이 된 걸 보고 그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 전교조 출신 교사는 교장이 되면 안 되나? 그들이 교장이 되면 교육을, 아이들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정으로 고민하고 걱정하는 일을 멈추기라도 한단 말인가?

전북에도 전교조 출신 교장이 있다. 겨우 대여섯 명이다. 그들이 어떤 학교를 만들고 있는지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알 것이다. 그들은 교장이 된 지금도 교육을, 아이들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정으로 고민하고 걱정하는 교사들이다. 그런 걱정을 밑거름으로 학교를 희망의 공동체로 만들고 있다. 진보 교육감과 함께 일하는 교사들이 늘어서 곤혹스러워 하실 필요도 없다. 진보 교육감은 혼자 진보가 되는 게 아니다.

그는 얼마 전 한 '부자신문'에 시를 연재했다. 오랫동안 그는 그 신문의 '동지'였다. 그러나 시인이여, 아는가. 그 신문은 당신이 강조한 '교육을 지키고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 그 싸움을 하는 사람들의 적이다. 그런 부조리한 신문과도 영혼을 섞는 시인이 '교육을 지키고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생급스레 '동지'라 부르며 지청구를 날리니 그저 황당할 뿐이다. 듣그러운 소리 접고 시인이여, 제 눈의 들보부터 뺄 일이다.

'희망 칼럼'에 절망 칼럼을 싣는 <교육희망>이 자꾸 절망스러워진다.

2011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