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걸린 이건창 생가
‘어? 이런 일이 있었네.’
무심히 기사를 읽다가 놀랐습니다. 이건창 생가가 소송에 휘말린 겁니다. 생가 주변에 땅을 가진 어떤 분이 이건창 생가를 ‘인천광역시 기념물’에서 해제해 달라고 소송을 냈습니다.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이유입니다. 소송인은 이건창 생가가 엉터리로 복원됐고, 더구나 이건창이 태어난 곳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그렇지 않다, 이건창 생가는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다, 판결했습니다. 그러자 소송인이 항소했습니다.(연합뉴스, 2024.06.28. 손현규 기자)
이건창 집안의 청빈함을 보여주려는 의미였을 테지만, 아닌 게 아니라, 복원된 이건창 생가는 너무 소박합니다. 초가는 그렇다 쳐도 규모가 지나치게 작습니다. 할아버지 이시원, 아버지 이상학, 그리고 이건창, 이렇게 삼대 가족이 살던 집이라는데요.
생가(生家)의 본디 뜻은 ‘태어난 집’입니다. 이건창 생가는 정말 그가 태어난 집일까요?
개성인가, 강화인가
개성에서 태어났다는 게 통설입니다만, 저는 화도면 사기리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여깁니다. ‘이건창 생가’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짚어 봅니다.
조부 이시원(李是遠, 1790~1866)이 개성유수로 가게 되자, 이건창의 어머니가 이시원을 따라갔습니다. 돌아가신 시어머니 대신 시아버지를 봉양하려고 나선 겁니다. 물론 아들 이상학도 강화와 개성을 오갔겠죠. 그때 거기 개성에서 이건창을 낳았다는 것이 개성 출생설입니다.
황현이 《매천야록》에, 이시원이 “개성에서 3년 동안 있으면서 자신이 머무는 관아에서 건창을 낳았으므로 그의 아명을 송열(松悅)이라”고 했다고 썼습니다. 이 기록이 개성 출생설의 근거로 말해집니다. 이건창의 어릴 때 이름이 ‘송도에서 얻은 기쁨’ 정도로 해석되는 ‘송열’이기에 개성 출생설이 설득력을 더 얻게 되었습니다.
앞에 소개한 소송에서 재판부는 “이 선생의 동생인 이건승이 편찬한 집안 사료에는 강화도가 출생지로 기재돼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저는 아직 ‘이건승이 편찬한 집안 사료’를 보지 못했습니다.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건창이 강화에서 출생했을 것으로 말하는 이유는 이러합니다.
《비변사등록》에 따르면, 이시원이 개성유수에 임명된 것이 1850년(철종 1) 4월 26일입니다. 임기를 마치고 총관에 임명된 것은 1852년(철종 3) 2월 3일입니다. 같은 날 철종은 새 개성유수로 김시연을 임명합니다. 그러니까 이시원이 개성유수로 근무한 기간은 임면일 기준으로 1850년 4월~1852년 2월입니다.
임기 끝난 이시원이 개성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새 개성유수가 왔으니 더 있을 수도 없습니다. 《승정원일기》는 철종이 1852년(철종 3) 3월 30일에 이시원을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임명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동지경연사’는 경연에서 임금을 가르치는 ‘선생님’입니다. 수시로 입궐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이건창은 1852년(철종 3) 5월 26일에 태어났습니다. 조부 이시원이 개성유수직을 마치고 거의 4개월 뒤입니다. 동지경연사가 되고 대략 2개월 지나서입니다. 그렇다면, 시기적으로 이건창이 개성에서 태어났다고 보기 어려운 겁니다. 개성에서 그것도 개성유수부 관아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아명이 송열(松悅)이라는데?”
저는 이건창이 송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잉태’된 것으로 여깁니다. 며느리가 임신하자 이시원이 기뻐하며 뱃속 손주를 ‘송열’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일종의 태명으로요.
아무래도 이건창이 개성에서 태어났다는 《매천야록》 기록은 사실이 아닐 것 같습니다. 황현이 뭔가 착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명미당 현판은
이건창 생가에 가면, 明美堂(명미당)이라고 새긴 현판을 보게 됩니다. 명미당은 이건창의 당호(堂號)입니다. 당호를 명미당으로 정한 이유를 이건창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충정공(조부 이시원)께서 장차 운명하시면서 유서를 남길 적에 정자(程子)의 ‘바탕이 아름다우나 명철함을 극진히 하다[質美明盡]’라는 말을 인용해 <나를> 격려했던 까닭에 明美堂으로 당호를 내걸었다.”
명미당 현판에 ‘梅泉(매천)’이라는 작은 글씨도 보입니다. 매천은 황현의 호입니다. 황현은 이건창과 아주 가깝게 지냈습니다. ‘아, 황현이 쓴 거로구나.’ 제가 여러 해 전에 낸 책, 《강화도史》에 현판 ‘明美堂’이 황현의 글씨라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틀렸습니다. 황현이 아니라, 황현과 같은 호를 가진 梅泉 이왕재(1928~2001)의 글씨였습니다. 현판에 새긴 낙관을 확인하고야 알았습니다.
처음부터 꼼꼼하게 따져 보고 책에 썼어야 했는데, 당연히 그러려니, 짐작만으로 황현의 글씨로 단정했습니다. 제 책을 읽고, 명미당 글씨를 황현이 쓴 것으로 알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이건창의 삶
이제 거기 생가에 살았던 사람,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영재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을 만나봅시다. 정제두에서 비롯된 조선 양명학(강화학)이 뿌리를 내리고 계승된 곳이 강화입니다. 이건창은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주요 인물입니다.
학문이 깊고 문장이 탁월하여 당대부터 명성이 높았습니다. 관료로서도 아름다웠습니다. 자기나 집안의 부귀와 영광이 아니라, 오로지 백성을 위해 온 힘 다했던 관료였기에 아름답다고 평합니다.
나이 열 살에 사서삼경을 뗐다는 이건창, 1866년(고종 3)에 불과 15세 나이로 과거에 급제합니다. 조선 통틀어 스무 살 되기 전에 급제한 사람이 30명이고, 그중 최연소 합격자가 이건창이라고 합니다.(《조선의 마지막 문장》) 워낙 어린 급제자라 몇 년 지나서야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어사 활동에 주목합니다. 알려지기야, 암행어사로는 박문수가 최고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이건창이 더 훌륭했다고 믿습니다.
1877년(고종 14)에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었습니다. 이때 이건창 어사는 충청도 관찰사로 근무했던 조병식(趙秉式)의 엄청난 탐학을 찾아내 처벌받게 했습니다. 조병식은 거물 실세였기에 아무리 암행어사라고 해도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건창은 원칙과 정의만 생각하고 실천했습니다.
멀리 귀양 갔던 조병식이 오래지 않아 풀려났고 관직에 복귀합니다. 이건창에게 해코지도 한 것 같습니다. 이건창이 어사 활동할 때 형벌을 가혹하게 해서 사람이 죽었다는, 무고성 고발을 당합니다. 고종은 이건창을 평안도로 유배 보냈다가 몇 개월 뒤에 풀어줍니다. 아무래도 조병식이 뒤에서 움직여 이건창이 벌받게 한 것 같습니다. 이후 이건창은 두 번 더 유배길에 오릅니다.
조병식은 강화유수도 지냈습니다. 선정비(불망비)가 무려 3기나 있습니다. 강화읍 갑곶돈대 마당에 2기가 있고, 삼산면에 1기가 있습니다. ‘유수 겸 진무사 조병식이 백성을 사랑하고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는 비’ 식으로 새겼습니다. 조병식이 강화에서는 정말 선정을 베풀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이건창은 이후 한 번 더 암행어사로 나갑니다. 이번엔 경기도입니다. 구석구석 조그만 섬까지 다 가서 백성의 삶을 살폈습니다. 기근에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내어주고, 세금을 줄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죄지은 이들에 대한 준엄한 처벌!
소문이 났나 봅니다. 지방관마다 어사 이건창을 기억했겠죠. 고종이 탐욕을 부리는 지방관에게 “만약 악행을 개선하지 않으면 내가 장차 이건창 같은 암행어사를 보낼 것이니, 너는 후회가 없도록 하라!” 경고하곤 했습니다.
기어이 모도까지
영종도 바로 위에 신도, 시도, 모도가 있잖아요. 모도는 강화 동검도의 절반 정도 되는 아주 작은 섬이에요. 이건창 어사가 거기까지 갔습니다. 사실, 모도까지는 안 가도 누가 뭐랄 사람 없는데, 기어이 가서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세금 고통을 덜어주었습니다.
모도 백성들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이건창 어사 불망비를 세웠습니다. 모도에 가서 이건창 불망비를 보니, 감회가 새롭더군요. 비석 앞을 오래도록 떠나지 못했습니다.
이건창이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내가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었을 때 조부 충정공이 처음 암행어사가 되어 큰 명성을 세운 것을 염두에 두고 그것의 만분의 일이라도 이을 수 있기를 바랐다. … 내가 아는 바를 다하여서 백성들에게 이익되는 것을 궁구하여 베풀어 주었다.”
이미 할아버지 이시원도 암행어사로서 명성이 높았습니다. 할아버지가 그랬듯, 본인도 어사로서 힘을 다하여 백성들을 보살피고 구했다고 했습니다.
이건창은 중앙 관직에 있을 때도 백성에게 도움을 주려고 무진장 애썼습니다. 기우는 나라의 앞날을 고뇌했습니다. 그가 살아낸 세월 자체가 고뇌의 시간이었습니다.
병인양요(1866, 15세), 신미양요(1871, 20세), 강화도조약(1876, 25세), 갑신정변(1884, 33세), 을미사변(1895, 44세), 아관파천(1896, 45세), 대한제국 선포(1897, 46세). 그리고 47세 된 1898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그리웠던 이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 안에 막냇동생 이건면(1863~1894)도 있을 겁니다. 건창보다 열 살 넘게 어린 건면은 관직 생활로 바쁜 형님 대신 식구들을 돌보다 32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건창·이건승·이건면, 형제간 우애가 깊었습니다. 출타한 하나가 어둡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둘이 마을 어귀에 나가 하나를 기다리던, 그런 삼형제였습니다. 동생의 죽음에 이건창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또 미안해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동생이 죽었을 때, 이건창은 눈물로 글을 썼습니다. “함께 전등사에 가지 않았던가? 전등사에서 함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나는 지금 집에 있는데, 너는 홀로 어디에 갔는가?”
하늘에서 동생을 만났을 테지만, 지금, 이건창은 또 슬플 겁니다. ‘아, 어찌하여 내 살던 집이 송사에 휘말렸는가.’
〈강화투데이〉 2024년 7월 16일 제6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