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1623-1649)가 즉위하고 얼마 안 돼서 이괄(李适, 1587-1624)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김포 옥성사에 모셔진 장만은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반란을 진압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장만의 공은 높이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다만, 이괄이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에 관해서는 더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쿠데타에 가담하는 사람들은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성공하면 부귀와 권세가 가까워지지만 실패하면 바로 죽음이니까요.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가 새 왕으로 즉위한 인조반정. 이 사건을 주도한 사람들은 이귀, 김류, 이괄, 김자점 등입니다. 이괄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가담하기는 했지만, 군사를 지휘하며 역모를 성공하게 한, 그러니까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한 사람입니다.
인조가 즉위하자 자신이 왕이 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공신 칭호를 주어 표창합니다. 총 53명을 표창했는데 1등 공신이 이귀, 김류, 김자점, 최명길 등 10명입니다. 2등 공신은 15명, 3등 공신은 28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괄은 1등 열 명에 들지 못하고 2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이괄은 섭섭함을 느꼈을 겁니다. 더구나 중앙 관직을 받지 못하고 북쪽 국경의 수비 책임자로 임명받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지기를 이괄이 자신에 대한 섭섭한 대우에 불만을 품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처음부터 반란 의도가 있던 것이 아닙니다. 조정에서 먼저 자신에게 비수를 들이대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일으킨 반란이었습니다. 그 대략적인 과정을 살펴보죠.
당시의 북쪽 국경 수비는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명과 각축하고 있는 후금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총책임자는 도원수 장만이었습니다. 인조는 장만과 논의한 후 이괄을 부원수로 임명합니다. 이괄을 무시해서 지방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높게 평가하여 보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부원수 이괄은 주력부대 1만 명을 거느리고 평안도 영변에 주둔하게 됩니다. 도원수 장만은 5천의 지원부대와 함께 평양에 주둔합니다. 그러니까 실질적인 국경 수비 책임은 이괄에게 있던 것입니다. 이괄이 영변에서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성책을 보수하며 후금의 침략을 대비하고 있을 때, 조정에서 엉뚱한 일이 벌어집니다.
정권을 잡은 서인 세력이 조정에 남아 있던 북인 세력을 내몰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북인들이 이괄과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허위 보고를 한 것이지요. 그 보고는 거짓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김류, 김자점 등이 계속해서 이괄을 서울로 소환해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이괄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을 서울로 부르기로 결정이 납니다.
이괄은 자기 아들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 등을 죽이고 병사들을 몰아 서울로 쳐내려 갑니다. 장만의 5천 군사가 지키는 평양을 피해서 남쪽으로 내려간 이괄은 황해도 황주와 임진강 등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서울까지 점령합니다. 임금 일행은 서울 함락 직전 공주로 피난 가서 무사했지만, 반란군에게 도성을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서울을 장악한 이괄은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고 백성을 진정시키며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이괄의 성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평양에서 뒤쫓아 온 장만이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병력을 재정비했기 때문입니다. 이괄은 관군에게 대패한 후 이천으로 피해가 재기를 노리게 됩니다만,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자기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죠. 부하들이 이괄의 목을 관군에 바치고 항복합니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인조가 즉위하고 1년도 채 되지 않았던 1624년 1월 22일이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것은 2월 10일, 이천으로 도망했을 때가 2월 15일이었습니다. 급하게 피어올라 한순간에 모든 걸 다 태우고 재가 된 불꽃 같았습니다.
이괄은 아들이 붙잡혀 가는 걸 그냥 볼 수 없었습니다. 서울로 끌려가면 모진 고문 끝에 죽게 될 것이고 산다고 해도 몸이 온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들이 고문의 고통을 못 견뎌 아비가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고 허위 자백이라도 하게 되면 자신도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동정이 갑니다.
그러나 그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외적의 침략 가능성이 없는 곳에 근무하고 있었다면 모를까, 언제 후금군이 국경을 넘을지 모르는 비상시국에 최전방 수비군을 빼내 서울로 쳐내려 간 것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김포역사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