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섬답게 강화에는 국가지정 문화유산이 많습니다. 보물이 ‘강화 장정리 오층석탑’을 비롯해 12건입니다.(국보는 없습니다) 사적은 ‘강화 삼랑성’을 포함해 16건입니다.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를 포함해 5건의 천연기념물도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군청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근 사적이 하나 추가됐습니다. 2023년 11월 22일에 ‘강화 망산 봉수 유적’이 서해안 다른 지역 봉수와 함께 사적으로 지정된 것입니다. 내가면 망산은 덕산으로도 불립니다. 그곳에 봉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문화재청은 보도자료를 통해 “조선 후기 군사 통신시설인 ‘제5로 직봉(전남 여수∼서울 목멱산)’ 노선상에 위치하는 61개 봉수 유적 중 역사적·학술적 가치, 잔존 상태, 유구 확인 여부 등을 고려하여 16개소를 국가지정 문화유산 사적 「제5로 직봉」으로 지정하였다.”고 발표했습니다.
해당 16개소 봉수 유적은 여수 돌산도, 고흥 마북산, 고흥 장기산, 장흥 전일산, 해남 좌곡산, 해남 달마산, 해남 관두산, 진도 첨찰산, 무안 고림산, 영광 고도도, 부안 점방산, 논산 황화대, 논산 노성산, 천안 대학산, 평택 괴태곶, 강화 망산입니다.
봉수(烽燧)는 국경지방에서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이를 알리는 군사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고려시대에 외국 사신의 길 안내를 위해 봉수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봉(烽)은 횃불이라는 의미이고, 수(燧)는 연기라는 뜻이에요. 낮에는 불이 잘 안 보이기 때문에 연기를 피워서 신호를 보내고, 밤에는 횃불로 연락을 취했기 때문에 봉수라고 합니다.
적의 침입이 없는 평상시에도 봉수를 올렸을까요?
예, 올렸습니다. “이상 무!”라는 의미로 봉수 하나를 올렸습니다. 그래야 저 산꼭대기 봉수대에 사람이 제대로 근무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지요. 백성들도 봉수 하나 올린 걸 보며 ‘오늘도 별일 없구나.’ 안심하게 되고요.
고려 때는 봉수를 1~4개 올렸습니다. 평상시 아무 일 없을 때는 횃불이나 연기를 한 개 올리고, 비상시에는 상황이 급박한 정도에 따라 네 개까지 올린 겁니다.
조선시대에는 하나가 늘어 1~5개 올리게 됩니다. 평시에는 이상 없다는 의미로 1개를 올리고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개, 국경을 침범하면 4개, 전투가 벌어지면 5개를 올리도록 했습니다. 강화처럼 해안을 끼고 설치된 봉수의 경우, 평상시 봉수 1개, 적선이 바다에 나타나면 2개, 해안 가까이 접근하면 3개, 우리 병선과 전투가 벌어지면 4개, 적병이 뭍에 상륙하면 5개를 올리게 했습니다.
불이나 연기를 피우기 위해서는 봉수대를 설치해야 합니다. 전망이 좋은 산 정상 부근에 봉수대를 세우는데 너무 높은 산은 피했습니다. 주로 200m 안팎 높이의 산에 설치했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야트막한 산이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높은 산에도 봉수대를 두었습니다.
왜 높은 산을 피했을까요?
너무 높으면 봉수군이 오가기 힘듭니다. 관리가 어렵습니다. 날이 맑아도 높은 산 정상부는 구름에 덮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름에 갇히면 봉수를 올려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높은 산에는 봉수대를 설치하지 않으려고 한 겁니다.
횃불과 달리 연기는 약한 바람에도 흩어집니다. 연기가 흩어져 버리면 2개를 올린 것인지, 3개를 올린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지요. 그래서 연기가 곧게 올라갈 수 있도록 마른 말똥과 소똥을 왕겨나 솔잎 등과 섞어서 연기를 피웠습니다. 연기가 흩어지지 않게 하는 데 이리 똥과 여우 똥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만, 쉽게 구할 수가 없어서 말과 소의 똥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낮에 알리는 것은 반드시 연기로 하는데, 바람이 불면 연기가 곧바로 올라가지 못하므로 후망(候望)하기 어려우니, 이제 봉수가 있는 곳에는 모두 연통을 만들어 두게 하라.” 《성종실록》
성종이 명했습니다. 이때부터 봉수대에 연통이 설치됐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봉수길은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돼 있었습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①함경도 경흥 ②경상도 동래 ③평안도 강계 ④평안도 의주 ⑤전라도 순천에서 서울 목멱산 봉수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경흥·강계·의주는 주로 북쪽 여진족의 침략을 대비함이요, 동래·순천은 주로 남쪽 왜군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강화의 봉수는 전라남도 순천에서 올라오는 봉수길에 속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번에 사적으로 지정된 ‘제5로 직봉’입니다. 문화재청은 ‘제5로 직봉’이 시작되는 지점을 전남 여수라고 했는데 《증보문헌비고》는 순천이라고 했죠? 왜 그러냐면요, 조선 당시에 여수는 순천도호부 소속 고을이었습니다. 순천 안에 여수가 포함된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남북 국경에서 서울까지 봉수가 도착하는 시간은 대략 얼마나 걸렸을까요? 12시간 정도라고 말해집니다. 12시간! 틀린 건 아닙니다만, 진실도 아닙니다. 평상시 정해진 시간에 매일 똑같이 올리는 봉수가 12시간 정도 걸린 겁니다. 습관처럼 반복되는 작업일 때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적의 등장·침입이라는 실제 상황 발생 때 얼마나 걸렸는가, 이겁니다.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다음 사료가 대략적인 시간을 알려줍니다.
“국초에 봉수가 경계를 늦출까 염려하여 남몰래 변방에서 시험 삼아 봉화를 들게 하자 5∼6일 만에 서울에 이르렀었는데…” 《중종실록》
5~6일 정도입니다. 국경에서 불시에 봉수를 올리게 하고 그게 서울까지 도착하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잰 겁니다. 그랬더니 5~6일 걸렸습니다.
각 지방 봉수대는 대략 10~20리 내외로 설치되어 서울까지 이어집니다. 비바람이 몰아쳐서 봉수를 올릴 수 없을 때는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서 소식을 전했다고 합니다. 너무 높은 산에 봉수대가 있다면, 이런 연락이 더 힘들어지겠죠.
봉수제도는 운영 당시 가장 신속한 연락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봉수군의 근무 자세나 날씨에 따라서 연락이 끊기는 일이 잦았습니다. 봉수를 올리지 않으면 봉수군과 해당 고을의 수령까지 처벌받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강화부 유수 이의필이 장계하기를, “이달 7일 본부의 남산 봉대(烽臺)에서 봉화를 올리지 않았는데 조사해 보니 봉직(烽直)이 술에 취하여 실수하였다고 했습니다. 제대로 단속하고 경계하지 못한 잘못이니 황공하여 처벌을 기다립니다.” 하였다. 비변사가 해당 유수를 파직하도록 계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정조실록》
정조 때 이런 일이 있었네요. 강화 남산 봉수군이 술에 취해 봉수를 올리지 못했고 그 결과 강화유수가 파직됐습니다. 봉수가 끊겼다고 그 지역 수령이 항시 파직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기강의 차이에 따라 달랐겠지요. 아무튼, 강화유수 자리가 보통 자리가 아닌데도, 정조는 엄히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러면, 이론상 봉수를 올리지 못했을 때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보지요. 시기에 따라 처벌 규정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는데요, 1532년(중종 27) 당시의 규정에 따르면, 적이 출현했을 때 봉수를 올리지 않으면 봉수군은 장(杖, 곤장) 80대, 수령은 70대를 맞아야 했습니다. 적이 국경에 이르렀는데 봉수를 올리지 않으면 봉수군은 장 100대, 수령은 장 100대에 더해서 파직입니다. 적과 접전이 벌어졌는데도 올리지 않으면, 봉수군과 수령 모두 참형에 처합니다.
“남산에 봉수대가 있었어?” 예, 그렇습니다. 혹시 북산에도 봉수대가 있었을까요?
북산에도 있었습니다. “아니, 남산·북산 둘 다 봉수대를 운영할 필요가 있나?”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처음에 북산 봉수를 운영하다가 1677년(숙종 3)부터 북산 대신 남산 봉수를 쓰게 됩니다. 그 계기가 이러합니다.
강화유수 허질이 아뢰기를 “본부의 봉수가 고을 뒤편에 있는데 앞뒤가 막혀 멀리 망볼 수가 없으므로, …. 앞산의 한 봉우리는 산세가 가장 높고 사면에 막힌 곳이 없으며 그 위에는 우물도 있으니, 뒷산의 봉수를 이 봉우리에 옮겨 설치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그러나 변통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감히 이를 아룁니다.”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비변사등록》
강화유수 허질이 청해서 북산 봉수를 폐지하고 남산 봉수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허질 유수의 말 가운데 ‘고을 뒤편’ 봉수가 북산 봉수이고, ‘앞산’이 남산입니다.
이제, 강화 어디어디에 봉수대가 설치됐었는지 표를 통해 확인해 보세요.
<강화의 봉수>
출처 | 봉수 전달 순서(좌→우) | |||||
《세종실록지리지》 (1454년) |
대모산 | 진강산 | 망산 (덕산) |
별립산 | 송악산 (북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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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 |
대모산 | 진강산 | 망산 (덕산) |
화개산 | 하음산 (봉천산) |
송악산 (북산) |
《강도지》 (1696년) |
대모산 | 진강산 | 망산 (덕산) |
화개산 | 하음산 (봉천산) |
남산 |
《강화부지》 (1783년) |
대모산 | 진강산 | 망산 (덕산) |
화개산 | 하음산 (봉천산) |
남산 |
조선 초에는 별립산, 북산을 거치는 경로였는데 조선 후기에는 화개산, 봉천산, 남산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강화부지》 기준으로 볼 때 저 아랫녘 전라도에서 올라온 봉수가 불은면 대모산, 진강산, 망산, 화개산, 하음산, 남산을 거쳐 김포로 가고 김포에서 서울에 이르게 됩니다. 이 가운데 망산 봉수가 이번에 사적으로 지정된 것입니다. 교동 화개산 봉수도 일부 시설이 남아 있는데, 거기는 제외됐네요.
〈강화투데이〉 2023년 12월 15일, 제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