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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사극 ‘연인’ 속 길채와 장현의 사랑 이야기

설렁설렁 보기 시작한 MBC 사극 연인에 그만,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단지 남궁민이 나오는 드라마라서 보기 시작한 것인데 이야기 전개가 탄탄하고 메시지도 묵직해서 충직하게 본방사수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바지로 향하는 연인’, 끝나면 되게 허전할 것 같습니다.

시대 배경이 병자호란입니다. 그때 주인공 유길채(안은진 분)도 강화로 피난 왔다가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강화도 함락 직전에 세손(소현세자의 장남)은 교동으로 피해 가서 무사했습니다. 내관 김인과 강문성 등이 생후 10개월 된 세손을 교대로 업고 뛰어서 교동 가는 배에 겨우 올랐다고 해요. ‘연인의 작가는 그걸 길채가 세손을 구하는 것으로 각색했습니다.

길채가 세손을 안고 뛰는 바닷가 장면은 명장면이었습니다. 보면서 굳이 저런 내용을 넣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뒤에 보니 길채가 세손 구한 인연으로 세자빈을 만나게 되더군요. , 계획이 있던 겁니다.

저는 그때 강화에서, 길채도 청나라로 끌려가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무사하게 그냥 전쟁이 끝나더군요. 으잉? 밀고 당기기에 능한 작가에게 당했습니다. 병자호란이 종결된 뒤, 어느 날 갑자기, 길채가 청나라로 끌려갔으니까요. 청군에게 붙잡힐 위기에서 여러 여인이 절벽에서 뛰어내립니다. 자결로 정절을 지켜야 한다고 교육받은 대로 행동한 겁니다. 그러나 길채는 안 죽습니다.

 

유길채 역 안은진[사진출처 MBC]

 

내가 왜 죽어?’

아름다운 당돌함입니다. 당대의 사회 인식과 관습을 거부한 길채는 청나라에서 모진 시련을 겪고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환향녀가 된 것입니다. 역시나 사방에서 손가락질입니다. 오랑캐에게 더럽혀진 여자라고 욕들합니다. 길채는 그 욕을 개 짖는 소리로 단정합니다.

무조건 이혼당해야 하는 시대, 길채는 외려 남편 구원무에게 이혼을 요구합니다. 구원무, 참으로 찌질한 남편상입니다만, 그때 남자들의 인식이 대개 그러했습니다.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말하며 길채가 던진 대사가 이러합니다.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건 제 잘못은 아닙니다.”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건 제 잘못은 아닙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말로 표현하자면 팩폭’(팩트 폭격)입니다. 그렇습니다. 유길채 잘못이 아닙니다. 환향녀의 잘못이 아닙니다. 전쟁을 예방하지 못하고, 적군을 막아내지 못한, 임금과 신하들을 비롯한 조선 남자들이 잘못한 겁니다. 남자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외면하고 여자들의 잘못만을 엄히 탓했습니다. 그 허위를 깨부수는 한마디가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건 제 잘못은 아닙니다.”입니다.

유길채의 이장현(남궁민 분)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망설임이었습니다. 철없던 낭자에서 철든 여인으로 성숙하면서 비로소 그녀의 사랑도 성숙합니다. 처음에는 자기를 위해 장현을 밀어내는 듯하더니, 나중에는 장현을 위해 장현을 밀어내려고 애씁니다.

 

이장현 역 남궁민[사진출처 MBC]

 

반면에 장현의 길채에 대한 지고지순 사랑은 서론·본론·결론이 똑같습니다.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숭고한 사랑입니다. 몇 번이나 길채 모르게 목숨을 구해주고도 내색하지 않습니다. 공치사가 없습니다. 남자가 봐도 남궁민이 연기하는 이장현의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때로 쓸쓸하고 때로 쓰라려도 여전히 멋집니다. 그 자체가 교훈적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길채와 장현이 조선 땅에서 재회합니다. 장현이 길채에게 말합니다. 어떤 조건이었든, 어떤 상황이든, 길채 그 자체를 좋아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길채가 어렵게 어렵게 묻습니다.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길채는?”

장현의 대답은 이 드라마가 의도한 또 다른 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윽한 눈빛으로 길채를 바라보던 장현이 대답합니다.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 장현이 눈물 그렁한 길채의 얼굴을 보듬으며 말을 이어갑니다. “많이 아팠지?, 많이 힘들었지?”

뭔가요. 드라마 보는 나까지 위로받는 이 기분은? “나도 마이 아퍼, 마이 힘들어.” 말하고 싶어집니다. 아무튼, 길채가 시대를 뛰어넘는 주체적 여인상을 보여주고 있다면 장현 역시 당대에 보기 드문, 이상적인 남성성을 드라마에서 구현하고 있습니다.

 

사신(史臣, 사관)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조선 남자들의 환향녀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인조실록기록입니다. 지난 47(2023.09.30.)에 소개했었는데 다시 옮겨왔습니다. 그런데요, 사관의 말이 여기서 끝난 게 아닙니다. 이어지는 말이 더 있습니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 잘못됨이 심하다. … 선정(先正, 선현)이 말하기를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이는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 하였다.

 

병자호란 시기 주화파의 대표 인물인 최명길 얘기입니다. 사관이 최명길을 비판하고 있네요. 자기들 생각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최명길의 환향녀에 대한 인식은 드라마 속 이장현의 생각과 흡사했습니다. 다음은, 최명길이 심양에 갔을 때 겪은 일을 인조에게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신이 심양의 관사에 있을 때, 한 처녀를 값을 정하고 속(贖)하려고 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위배하고 값을 더 요구하자 그 처녀가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칼로 자기 목을 찔러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끝내는 그녀의 시신을 사서 돌아왔습니다.

 

최명길이 청나라에 갔을 때 어떤 처녀를 구해오려고 했는데 그 주인이 속환가를 너무 많이 올리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네요. 낙담한 처녀가 자결했습니다. 여기서 멈췄어도 최명길은 이미 훌륭합니다. 우리 백성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최명길은 처녀의 시신 값을 치르고 거두어 와 고국 땅에 묻힐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생면부지의 처녀였을 겁니다.

최명길은 청에서 돌아온 여인들을 내치지 말고 따듯하게 품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만큼 사람의 정()도 소중한 법이니 여인들을 죄인으로 몰아 이혼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를 사관이 몹시 잘못됐다며 비판했던 것입니다. 당시 남자들이 볼 때 최명길의 주장은 이단(異端)이지만, 사실은 선각(先覺)입니다. 장현의 길채에 대한 참사랑도 선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최명길 묘(충북 청주)

 

죽어야 존중받던 시대였습니다. 병자호란 그때 강화 땅에서 수많은 여인이 자결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은 여인이 있습니다. 길채처럼 말이지요. 이제, 기어이 살아낸 그 여인 이야기입니다.

 

난리 피해 강화도로 왔건만, 정작 강화도에서 더 끔찍한 난리를 겪었다. 청나라 군대에 점령된 강화도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함께 들어왔던 남편은 이제 저세상 사람. 겨우 20살 아낙은 어린 아들 손을 잡고 뭍으로 가는 선박에 올라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가 살았기에 다섯 살 아들도, 뱃 속의 아기도 살 수 있었다.

아낙은 스스로 미망인(未亡人)이라 칭하며 남편 따라 죽지 못한 죄인으로 살았다. 평생 화려한 옷, 좋은 음식 가까이하지 않았고 손수 수를 놓고 옷감 짜서 살림을 꾸렸다. 두 아들을 참으로 엄격하게 키웠다.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과부 자식이라서 그렇다는 말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이 말을 너희들 뼈에 새겨라.” 이렇게 가르쳤다. 뼈에 새겨라!

자식 교육 열정,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어린 자식에게 말했다. “제때 배우지 않고 사느니 빨리 죽는 게 낫다.” 아들 앉혀 놓고 회초리 때려가며 《소학》, 《사략》 등을 직접 가르쳤다. 그만큼 학문도 깊었다. 밥 굶을망정 아이들 공부할 책은 어떻게든지 샀다. 도저히 살 수 없는 책은 빌려다 여러 날 밤새 베껴서 아이들에게 주었다.

그녀는 자식 교육을 어미의 도리가 아니라 산 자의 사명감으로 여긴 것 같다. 제대로 키워놓아야 죽어서 남편 얼굴을 떳떳하게 볼 수 있다고 여긴 것 같다. 두 아들은 학문과 인격을 쌓으며 제대로 컸다.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도 높였다.

 

그녀가 키워낸 첫째 아들이 김만기입니다. 병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합니다. 둘째 아들은 병자호란 난리 때 어머니 뱃속에 있던, 그래서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김만중입니다. 김만중은 사씨남정기구운몽을 지었습니다. 벼슬은 공조판서, 대사헌, 대제학 등을 지냅니다.

김만중의 어릴 때 이름 그러니까 아명이 선생입니다. 어린아이가 어찌 선생인가? 선생(先生)이 아니라 선생(船生)입니다. 병자호란 때 그의 어머니 윤씨는 만삭이었습니다. 강화에서 육지로 피난 가는 배 안에서 만중을 낳았다고 합니다. 배에서 태어난 아이라서 선생으로 불렀던 모양입니다.

김만중의 출생지가 강화라고 말해지기도 합니다만, 글쎄요, 저는 좀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태어날 때 배가 어디쯤 가고 있었을까요? 강화 쪽일 수도 있고 김포에 가까울 수도 있고 인천에 근접했을 수도 있습니다. 설사 배가 강화도 해안에 있을 때 태어났다고 해도 그것을, 강화 출신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김만중이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강화성 남문루에서 김상용이 화약에 몸을 던질 때 함께 목숨 버린 김익겸입니다. 김익겸, 그때 나이 23살이었어요.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학생 신분이었습니다. 김상용 등과 함께 선원면 충렬사에 모셔졌습니다.

여러분이 강화투데이이번 호를 받으실 때쯤이면, 드라마 연인도 끝나게 될 겁니다. 새드 엔딩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이면서 소현세자 사람인 장현까지 없애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그래도 행복한 결말을 기대해봅니다.

그런데요, 작가가 새드 엔딩으로 마감해도 원망하지 않으렵니다. 과정이 충분히 좋았으니까요. 재밌게 보면서 당시 역사를 복기해보았고, 새삼스럽게 사랑, , 이런 것들의 의미라고 할까, 가치라고 할까, 그런 것들도 되새겨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연인, 이제 나는 너를 보낸다. 안녕!

 

강화투데이20231115,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