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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안타까운 역사, 반민특위 좌절 그리고 프랑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도 그였다. 이승만은 미국에 주로 머물며 독립운동을 했다. 그의 독립운동은 외교활동이다. 총을 들어야만 독립운동이 아니다. 전투만큼 중요한 것이 외교다.

1948년 제헌국회 의원들이 대통령을 뽑았다. 이승만은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첫 번째 대통령으로 자격이 있었다. 볼만한 업적도 남겼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은 역사에 큰 아쉬움도 남겼다. 상식적으로 풀어야 할 실타래가 이승만에 의해서 비상식적으로 뒤엉켜 버렸다. 친일파 처리 문제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그 긴 세월,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였다. 해방된 조국에서 우선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을까. 자신과 가족을 희생하며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 세력을 우대하고, 나라와 민족이 망하든 말든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일제에 아부하던 친일파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게 상식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친일파 처벌은 실패했다.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이 이승만에게 있다.

19488, 국회는 친일파 처단을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에서 만든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이 제정된다. 국회는 이 법률에 따라 반민족 행위자, 즉 친일파를 조사할 반민특위(反民特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

19491월부터 반민특위는 친일파 검거 활동을 시작했다. 일제 고등계 형사 노덕술을 체포했다. 그는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고문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대통령 이승만은 노덕술을 석방하라고 했다. 반민특위가 석방을 거부하자 반민특위 활동이 헌법 위반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친일파들은 반민특위 위원들을 암살하려고도 했다.

사실 친일파 정리는 해방된 1945년 그때 바로 시도했어야 했다. 하지만 미군이 지배하는 미군정 시기(1945~1948)였다. 미국이 친일파를 숙청할 이유가 없다. 3년간 친일파는 견고하게 뭉쳤고 갖은 방법을 다해 생존력을 키웠다. 반탁운동에 뛰어들어 애국자 행세를 하기도 했다. 힘든 싸움이었다. 그래도, 고난 속에서도 반민특위는 친일파 검거를 계속했다.

 

반민특위에 체포된 친일파들[사진출처 조선일보]

19496,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서 물건을 부수고 서류를 압수하고 반민특위 사람들을 붙잡아 갔다. 대통령 이었다. 이후 반민특위 활동은 유명무실해진다. 재판에 넘겨진 친일파는 몇 되지 않았고 결국, 하나둘 다 풀려나갔다. 친일파 처벌은 이렇게 실패했다.

아마, 해방된 나라에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근신하며 조용히 살다 간 친일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렇지 않았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대재생산하면서 사회 각계의 지도층으로 행세했다. 그들의 부와 권력은 자손들에게 이어졌다. 반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심지어 탄압받기도 했다.

이승만은 친일파를 감쌌다. 그의 밑에 친일파가 많았다. 썩은 고기에 벌은 날아오지 않는다. 나비도 오지 않는다. 파리들만 들끓을 뿐이다. 4·19 혁명, 올 수밖에 없었다.

-《한국사 키워드 배경지식

 

 

※ 프랑스 사례

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0, 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했다. 항복한 프랑스에는 히틀러에게 협력하는 괴뢰정부가 세워졌다. 이에 반발한 드골은 외국으로 망명하여 대()독일 항전을 독려하게 된다. 프랑스 국내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이 시작되었다. 레지스탕스란 저항을 뜻하는 프랑스 말이다. 역사적으로는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인들이 독일 점령군과 그들의 앞잡이인 괴뢰정부에 대해 벌였던 저항 운동을 가리킨다.

1944년 레지스탕스 군은 연합군의 협력 아래 독일군을 몰아내고 해방을 쟁취한다. 해방된 프랑스의 드골 임시정부는 나치에 협력했던 반역자를 처단한다. 재판 결과 6,763명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이들 중 실제로 사형이 집행된 것은 767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2,702명에게 종신 강제노동형, 10,637명에게 유기 강제노동, 22,883명에게 징역형, 2,044명에게 금고형이 선고됐다. 가장 먼저 재판받고 사형에 처해진 사람들은 언론인이었다. 드골은, 언론인들을 첫 번째 심판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들이 도덕성의 상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독일의 지배가 몇 년 되지 않는 것에 비해 처벌된 인원이 상당히 많다. 그중에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 사회는 극도의 혼란도 겪었다. 나치 협력자 처벌은 정당하고 당연한 조치였다. 바른길이었다. 드골은 말했다. “애국적 국민에게 상 주고 민족을 배반한 범죄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