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에 이르는 과정은
3대 통감 데라우치가 이완용에게 조약안을 넘겼다. 이완용은 순순히 받아서 조정으로 왔다. 1910년 경술년 8월 22일, 순종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해 일본과 ‘병합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을사늑약 때와는 달리 반대하는 대신들도 없었다.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인 이완용이 이번엔 주연으로 나섰다. 데라우치와 조약을 맺고 조약문에 도장을 찍었다.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항에 열거한 양여를 수락하고 한국을 완전히 일본 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8조,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 폐하와 한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대한제국이 망했다.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졌다. 일본은 강제적 병합이라는 사실을 숨기려 했다. 외국의 부정적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 되기를 원해서 스스로 요청하고, 일본이 이를 허락해주는 식으로 조약문을 작성했다. 하긴, 1909년 12월에 친일단체 일진회가 합방 청원서를 제출했었다. 한국인이 자발적으로 일본의 식민지 되기를 원하는 청원이었다. 일본의 조종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제8조에 조약은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고 나온다. 공포일은 1910년 8월 29일이다. 이날 대한제국이 역사에서 사라졌다. 8월 29일은 나라가 치욕을 겪은 날, 국치일(國恥日)이다. 한일합방, 한일병합, 한일합병, 병합늑약, 경술국치 등으로 불리는데 이 책에서는 경술국치로 적는다.
경술년(1910),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을 돌아보자.
일본이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러일전쟁(1904~1905) 때이다. 청일전쟁이면 전쟁터가 청나라나 일본이어야 마땅하고, 러일전쟁이면 러시아나 일본 땅이 전쟁터가 되는 것이 당연하거늘 두 전쟁의 무대가 모두 한반도였다. 물론 한반도에서만 싸운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한반도는 아팠다.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대한제국에 멋대로 군대를 상륙시키고 조정을 압박해서 한일의정서(1904.2)를 체결했다. 대한제국은 대외 중립을 선언했으나 소용없었다. 제3조, “대일본 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하게 보증한다.” 확실하게 보증해?
한일의정서 제4조에서 일본이 우리나라 땅을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해 이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다. 언제까지라는 말도 없고, 어느 지역이라는 말도 없다. 이는 전쟁 수행을 위해서 대한제국 어디든 무기한 점유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일본은 전세가 유리해지자 ‘제1차 한일협약’(1904.8)을 강제로 맺었다. 이 조약에는 일본인 1명을 대한제국의 재정 고문으로, 외국인 1명을 외교 고문으로 둔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제 대한제국의 재정업무와 외교업무는 이들 고문의 동의와 허락을 받아야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재정 고문은 일본인 메가타, 외교 고문은 미국인 스티븐스가 왔다. 스티븐스는 미국인이지만, 일본의 외교 관료로 일하던 사람이다.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 작전에 충실히 임했다. 1908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장인환에게 사살됐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외교권을 잃었다. 고종은 승복하지 않았다.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준·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다.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려서 조약을 파기하려는 노력이었다. 그 먼 길을 힘겹게 갔으나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일본의 방해 공작 때문이었다. 다행히 세계 각국의 기자단 앞에서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외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이 나섰다. 그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설득력 있게 밝혔다. 한국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각국 대표단과 달리 기자들은 한국의 입장을 진지하게 들었고 이해했고 격려했고 기사로 썼다. 일본에 의해 얼뜨기 나라로 왜곡 포장됐던 한국이라는 나라의 자주 의지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이상설과 이위종은 독립운동에 나선다. 1917년, 러시아 땅, 이상설은 이런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내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어찌 죽은 영혼인들 고국 땅을 감히 밟으랴. 내 죽거든 화장하여 재를 시베리아 벌판에 날리라. 그리고 조국의 독립이 오기 전에는 제사를 지내라 말라.”
이준은 거기 헤이그에서 순국했다. 할복자살이라고 알려졌지만, 할복하지는 않았다. 병이 들어 앓았는데 음식 넘기기를 거부하다가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분사(憤死,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였다.
일본은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를 몰래 보내 외교 활동을 한 것은 을사늑약을 어긴 것이라고 했다. 그 책임을 묻는다는 핑계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고종의 아들 순종을 새 황제로 즉위하게 했다. 곧바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맺었다(1907). 조약이 맺어지는데 이완용이 애 많이 썼다.
이재명은 때를 기다렸다. 이완용을 처단할 때를. 1909년 12월 22일, 서울. 칼을 든 이재명은 이완용이 타고 있는 인력거로 뛰어들었다. 몇 차례 칼에 찔린 이완용은 굴러떨어졌다. 죽을 듯했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이재명은 체포됐다. 재판을 받았다. 재판장은 이재명을 비난하며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물었다. 이재명은 대답했다. “2000만 민족이다.” 그러자 재판장 안팎에서 “옳다!”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최종 재판 결과는 사형이었다. 이재명은 말했다. “불공평한 너의 법으로 나의 생명을 빼앗기는 하지만, 나의 충혼(忠魂)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살펴보자.
제1조,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을사늑약 때 통감은 이론상 외교 권한만 갖고 있었다. 이제 대한제국의 내정 실권까지 공식적으로 갖게 되었다.
제5조,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할 것.” 이에 따라 중앙 각부의 차관 등 요직에 일본인이 임명되었다. 지방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재정 고문, 외교 고문 필요도 없다. 그래서 고문 제도는 폐지된다. 아울러 한일신협약 부속 문서를 통해 “육군 1개 대대를 두어 황궁 수비 임무를 담당하게 하고 나머지는 해산”시키게 했다. 뭘 해산?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이다.
1909년에는 양국의 각서 형태로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빼앗았다. 제1조, “한국의 사법 및 감옥 사무를 완비할 때까지 한국 정부는 사법 및 감옥 사무를 일본 정부에게 위탁함.” 야비하게 ‘위탁’이라는 단어를 골라 썼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처단된 뒤 송병준 등이 이끄는 친일단체, 일진회가 나섰다. 자기네가 대한제국 2천만 국민의 대표라고 허풍떨면서 정부에 상소문을 올린다. 한일합병 해달라는. 심지어 합병성명서까지 발표했다. 웃픈 일진회. 이름은 또 그게 뭔가, 일진.
1910년 6월, ‘한국경찰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를 체결해서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일본에 위임하게 했다. 한마디로 경찰권까지 빼앗은 것이다. 외교, 행정, 군사, 사법, 치안, 모든 분야를 일본이 장악했다. 더 빼앗을 것도 더 빼앗길 것도 없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나라가 사라졌다.
끝으로 어느 신문에 실린 경술국치 관련 기사(2016) 일부를 소개한다. 생각해 볼 부분이다.
해방 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매년 8월29일이 되면 선언서를 발표하거나 기념식을 열었다. 국가의 치욕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다.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현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에서 제정하고 기념한 ‘3·1절’ ‘개천절’ ‘순국선열기념일’ 등은 모두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국치일은 기념하지 않고 있다. … 부끄러운 역사라고 해서 눈을 감고 있으면,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더 이상 눈을 감지 말자. 과거에 눈을 감으면, 미래를 볼 수 없다.(한시준, 한겨레신문, 201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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