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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고려궁지에서 보는 고려

최우의 결단, 천도

1232(고종 19) 2, 개성 조정에서 강화 천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됩니다. 고종 임금과 신하들 대부분이 천도에 부정적이었습니다. 616, 최우가 자기 집 세간살이를 강화로 옮깁니다.

고려사절요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어요. “최우가 왕에게 강화도로 행차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하였다. 최우가 녹전거(수레) 100여 대를 빼앗아 집안의 재물을 강화도로 옮기니, 개경이 흉흉하였다.”

 

다음 날인 617, 최우는 강화에 궁궐을 짓기 시작합니다. 76, 고종도 어쩔 수 없이 개성 궁궐을 떠나 강화로 향합니다. 77, 칠월칠석날, 고종이 송해면 승천포에 도착합니다. 비가 하염없이 내렸습니다. 궁궐을 막 짓기 시작했으니, 그곳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임금은 어디로 갔을까요? 객관(客館)으로 들어갔습니다. 객관은 객사라고도 하는데 출장 온 관리나 사신 등이 머무는 공적 공간입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천도였습니다. 하지만 강화도 조정이 점차 안정되면서 임금도 신하들도 천도하길 잘했다는 인식을 하게 됩니다. 이규보는 이런 시를 지어 자신감을 드러냅니다. 오랑캐가 아무리 사납다지만 / 어떻게 이 물을 뛰어 건너랴 /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한다오 / 누가 물에 들어가라 타이르겠는가 / 물에 들어가면 곧 다 죽을 건데

 

고려고종사적비(송해면 고려천도공원)

 

고려궁지는 어디인가

고려궁지(高麗宮址)! 고려궁궐이 있던 터[]라는 뜻이죠. 1964년에 사적으로 지정된, 강화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입니다. 그런데 정말 고려궁지가 고려 대몽항쟁기에 궁궐이 있던 터일까요?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요, 강화의 읍지에 고려 궁궐이 다른 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몇 해 전 고려궁지를 발굴했을 때, “여기가 고려궁지다!” 확신할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역사학자 중에서 지금 고려궁지는 고려궁지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한번 짚어봅시다. 김노진의 강화부지(1783) 등에 고려 궁궐의 위치가 이렇게 나옵니다. “在府東南亭子山外(재부동남정자산외)” ()는 강화유수부를, 정자산(亭子山)은 견자산을 말합니다. 풀이하면, 고려궁궐이 강화유수부 동남쪽 견자산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조산평에 궁궐이 있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강화부지등의 기록이 틀린 거라고 단언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현재의 고려궁지가 고려시대 궁궐이 있던 터, 맞는 것 같습니다.

 

천도 초인 1234(고종 21)에 궐남리(闕南里) 수천 채의 집이 불탔습니다. 고려사고려사절요가 이 끔찍한 화재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궐남리는 궁궐의 남쪽 마을을 가리킵니다. 당시 견자산 외곽은 갯가라서 수천 채 집이 몰려 있을 여건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궐남리는 동락천 남쪽 그러니까 지금의 신문리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동락천 북쪽 관청리 지역에 궁궐이 있었다고 해야 궐남리 수천여가(數千餘家)’가 말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 궁궐 외에 별궁(別宮)들도 있었습니다. 견자산 쪽에 별궁이 있었는데 이후 별궁이 궁궐로 와전되어 전해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견자산 쪽에 무신집권자 최우의 집도 있었는데, 그게 또 궁궐로 잘못 전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 고려궁지가 궁궐터로는 너무 좁지요? 그렇습니다. 지금 자리는 고려 궁궐의 뒷공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후원 정도의 기능을 한 것 같아요. 남쪽 경계는 용흥궁공원 김상용순의비쯤이었을 것이고요. 관련 학자들 대개가 현 고려궁지 아랫마을(궁골)이 궁궐의 중심 영역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강화도서관 뒤편 도로 발굴 때 궁궐의 일부로 보이는 건물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전 강화고려역사재단)에서 고지형 분석을 통해 고려궁지의 위치를 추정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공개했습니다. 5분여 정도의 동영상인데 유익합니다. 한번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음이나 네이버에서 인천문화유산 디지털 아카이브를 검색하셔서 영상콘텐츠에 있는 강화도성 궁궐을 보시면 됩니다.

 

고려궁지

 

내성·외성·중성

자연조건이 아무리 방어에 유리하다고 해도 결국은 사람이 지키는 것입니다. 방어시설을 제대로 갖추어야 합니다. 강화도 조정은 내성, 외성, 중성을 쌓았습니다. 궁궐이 완공된 때가 1234(고종 21)쯤입니다. 이 무렵 내성도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외성은 동쪽 해안에 쌓은 것 같습니다. 고려사에 외성 축성 시기가 언급됐는데 이쪽에서는 1233(고종 20)이라고 나오고 저쪽에는 1237(고종 24)이라고 나옵니다. 같은 책에 다른 연대가 나와서 좀 애매합니다.

그러다 보니 외성 공사를 1233년에 시작해서 1237년에 끝낸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1233년에 다 쌓았고 1237년에는 보강했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편 강화부지(1783)1233(고종 20) 12월에 외성을 쌓았고 1237(고종 24)에 외성을 증축(增築)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중성은 내성·외성보다 늦게, 1250(고종 37)에 쌓았습니다. 최우의 아들인 최항이 집권할 때였습니다. 선원면에 대문고개가 있지요. 대문(大門)이 있던 고개라는 뜻입니다. 거기 고려 중성의 출입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 중성 곳곳이 발굴되면서 그 실체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최근에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외성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간척 이전 강화도 동쪽 해안 지형은 몹시 복잡해서 배를 댈만한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구태여 해안가에 길게 성을 쌓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고려사등에 나오는 외성은 무엇인가? 외성이 곧 중성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디서는 외성을 외성이라고 쓰고, 어디서는 중성이라고 써서 별도의 성곽으로 보이지만, 실체는 외성=중성이라는 주장입니다. 무엇이 맞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강화의 성곽, 몽골군에게는 정말이지 부담스러운 시설이었습니다. 몽골군이 뭍에서 고려 전역을 휩쓸었어도 산성 전투에서는 꽤 고전했습니다. 1259(고종 46) 고려와 몽골이 화친조약을 맺을 무렵 몽골군은 가장 먼저 강화도의 성들을 부수게 했습니다. 동원된 고려의 병사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성곽을 허물어야 했습니다.

 

황제국, 고려

길고 긴 전쟁, 참으로 힘겨운 세월이었습니다. 너무 많은 백성과 군사가 죽거나 다쳤습니다.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대몽항쟁이 그렇게 대단해? 어차피 진 거잖아. 몽골에 항복했잖아?”

, 항복했습니다. 하지만 장기 항전 덕분에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고려인의 항쟁이 계속되자 몽골은 점점 초조해졌습니다. 그래서 고려에 거듭 양보해야 했습니다. 고려 고종을 대신해서 아들(원종)이 항복하러 갔을 때 쿠빌라이는 그야말로 버선발로 달려 나와 원종을 맞았습니다. 고려의 항복에 감사했습니다. 같은 항복이라도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의 굴욕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강화도 조정이 건재함으로써 고려가 살았습니다. 고려가 살았기에 조선이 있었고 조선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습니다.

 

<고려가> 왕이 다스리는 나라임에도 천자의 예()를 쓰고 있다. 무릇 큰 모임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으니, 이는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다.

고려사절요충렬왕 27(1301) 4.

 

충렬왕 때 몽골이 고려에 일종의 경고 문서를 보냈습니다. 천자 즉 황제의 나라에서만 만세(萬歲)를 부를 수 있고, 왕의 나라에서는 천세(千歲)를 부르는 것인데 고려가 건방지게 만세를 외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천세해야 할 고려가 어찌하여 만세했는가. 사실 고려는 황제국 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전하, 세자 대신에 폐하, 태자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고려 임금은 자신을 가리켜 ()’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 황제국의 격식을 따른 것입니다. 조선에서는 주로 과인(寡人)’이라고 했어요. 이호예병형공, 조선은 6조라 하였으나 고려는 6부라고 했습니다. ‘는 황제국의 관청입니다.

 

고려 초 광종 때인 96011, 고려사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개경을 고쳐 황도(皇都)라 하고, 서경을 서도(西都)로 삼았다.” 개성을 황제의 도읍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강도(江都)도 황도? 그렇습니다. 대몽항쟁기 강화 역시 황도(皇都)였던 것입니다.

고려가 황제국이었다, 대단하다, 강화가 황도였다, 대단하다, 이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내 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는 지배층뿐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스며있었을 겁니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 속에 고려인으로서의 당당함, 자존감이 꿈틀대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몽골에 맞서 장기 항전을 가능하게 했던 숨은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위 사료를 다시 봅시다. 고려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는 시기가 충렬왕 때입니다. 몽골에 항복하고 그들의 간섭을 받던 시기입니다. 그럼에도 고집스럽게 만세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고려의 기상이라고 할까, 그런 걸 느끼게 합니다.

이제 참고로 고려시대 무신정권 시기와 대몽항쟁 시기를 비교해보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고려에 무신정권이 선 것은 1170년입니다. 이때부터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김준, 임연, 임유무, 이렇게 11명의 집권자가 나왔습니다. 최우 때 몽골 침략이 시작됐습니다. 이때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지요. 김준 정권 때인 1259년에 몽골과 화의가 성립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임유무 때인 1270년에 개경 환도가 이루어집니다. 이로써 고려에서 무신정권도 끝납니다. 무신정권은 1170년부터 1270년까지 백 년간이었습니다.

강화투데이39, 2023.05.30. '몽골의 침략과 강화 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