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겨울, 영하 20도를 경험했습니다. 그래도 봄은 와 진달래, 개나리, 목련, 벚꽃, 영산홍, 강화가 꽃섬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신록입니다. 요맘때의 파릇한 저 신록, 참 좋아요. 모처럼 방구석을 벗어나 연미정으로 갑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렸습니다. 아래서부터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지요. 강화산성 남문 닮은 조해루(朝海樓)를 먼저 만납니다. 조해루는 강화외성의 성문입니다. 조선 후기, 강화 동쪽 해안에 외성을 쌓았습니다. 성을 쌓으면 드나드는 성문이 필요하죠. 조해루가 바로 외성 성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덕진진 공조루, 광성보 안해루 역시 강화외성 출입문입니다. 조해루에서 저 위 월곶돈대까지 성벽이 이어져 있지요? 그 성벽이 바로 강화외성의 일부입니다.
이제 경사 길 따라 연미정으로 향합니다.
정갈한 잔디밭 한가운데 검은색 빗돌이 섰습니다. 뭐라고 새겼나, 가서 보지요. “莊武公黃衡將軍宅地碑”(장무공황형장군택지비)라고 쓰여 있네요. 황형(1459~1520)의 집이 있던 터라고 합니다. 연미정에서 대월초등학교 사이에 황형의 묘소도 있습니다.
장무(莊武)는 황형(1459~1520)의 시호입니다. 시호 뒤에 ‘공’을 붙여 장무공으로 부릅니다. 시호는 업적이 두드러진 신하나 학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라에서 내리는 명예로운 호칭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시호가 충무(忠武)라서 충무공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충무공, 그러면 무조건 이순신을 떠올리지만,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이들이 더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만 따져도 9명이라고 해요. 김시민, 남이, 정충신 등의 시호도 충무입니다. 그들도 충무공인 것입니다.
황형은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명장(名將)입니다. 왜인들이 남녘에서 일으킨 삼포왜란(1510)을 진압했고 북으로 달려가 여진족의 침략을 막아냈습니다. …
자, 황형장군택지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세요. 그냥 빈터죠? 조선 후기에는 그 빈터 잔디밭에 진사(鎭舍)라고 부르는 군부대 건물이 여럿 있었습니다. 웬 군부대 건물? 예, 바로 월곶진이라는 부대가 있던 자리랍니다. 당시 해안경계부대인 진과 보 12개가 강화에 설치됐습니다. 보통 5진·7보라고 하지요.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지휘관이 통솔하던 곳이 월곶진입니다.
각 진·보마다 서너 개의 돈대가 딸려 있었습니다. 진과 보가 군부대라면 돈대는 군부대에 속한 일종의 초소였습니다. 월곶진에 속한 돈대는 적북돈대, 휴암돈대, 월곶돈대, 옥창돈대(옥포돈대)입니다. 진사와 한 공간에 있던 월곶돈대가 가장 중요한 돈대였지요. 그 월곶돈대 안에 연미정이라는 정자가 있는 겁니다. ‘진·보·돈대’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정리해서 〈강화투데이〉에 실을 예정입니다.
월곶돈대 출입문 앞입니다.
저 혼자 오든, 답사객을 모시고 오든, 월곶돈대 앞에 서면 좀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12진보 가운데 제일 상급 부대인 월곶진, 월곶진에서 으뜸인 월곶돈대, 그 위상이 상당한데도 불구하고 그냥, 연미정을 보호하는 담장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잖아요. 그래서 미안합니다.
보아야 보입니다. 월곶돈대 출입문을 보세요. 이쁜 홍예문입니다. 홍예문은 한자로 虹霓門이라고 씁니다. ‘虹’도 ‘霓’도 무지개라는 뜻입니다. 다른 돈대들은 담박한 사각형 문인데 월곶돈대는 정성을 더 들여서 무지개 모양으로 만들었어요.
현존하는 돈대 가운데 홍예문이 설치된 곳은 여기와 화도면 미루지돈대(미곶돈대), 양사면 구등곶돈대입니다. 미루지돈대는 가는 길이 꽤 불편하고 구등곶돈대는 북쪽 군사지역 안에 있어서 출입이 매우 어렵습니다.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월곶돈대뿐입니다.
〈강화투데이〉제37호(2023.04.30.), ‘오늘은 연미정 가는 날’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