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특별한 이유도 없이 확 짜증이 나고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다. 그러면 난 연미정에 가곤 한다. 방문객이 거의 없어서, 그 귀한 공간이 오롯이 내 것이 된다. 돈대 여장에 기댄 채 바다를 보고 하늘도 보고 바닥에 주저앉아 멍도 때리고 그러다 보면, 그래, 사는 게 다 그렇지, 훌훌 털어내게 된다. 그랬는데, 요즘은 연미정 분위기가 다르다. 찾는 이들이 평일에도 제법 많다. 나는 여전히 연미정을 사랑하지만, 여기서 멍때리기는 이제 하지 않는다.
“응? 정자라는데 웬 성벽이야?”
“저 안에 있나 보지.”
내 바로 앞에서 걷는 이들이 말한다. 처음 오시는 분들인 모양이다. 아래에서 보니 월곶돈대가 정말 높다란 성벽 같다. 아치형 출입문으로 들어간다. 그 많은 돈대 가운데 출입문이 아치형인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구등곶돈대는 북쪽 군사 구역이라 갈 수 없고, 미루지돈대는 남쪽이지만, 접근이 너무 불편하다. 편히 볼 수 있는 유일한 아치형 돈대 문이 여기, 월곶돈대다.
아직도 나는 꺾인 느티나무로 눈이 먼저 간다. 여전히 정자가 쓸쓸해 보인다. 좌우 두 그루 느티나무
와 서로 의지하며 수백 년 세월을 살아왔는데 2019년 9월 태풍 링링이 바다 쪽 느티나무 거대한 밑동을 꺾어버렸다. 나무는 정자와 돈대에 피해를 주지 않는, 딱 한자리로 얌전히 쓰러졌다. 고목 한 그루 쓰러졌다고 우는 건 이상하다. 그런데 그날 그 자리에 달려간 나는, 울었다.
바다를 보자. 왼쪽은 북한 땅, 오른쪽은 김포 땅. 그사이 길쭉한 섬은 유도다. 뱀섬이라고도 한다. 거기쯤이 강의 끝이고 바다의 시작이다. 긴 여정 끝낸 한강이 임진강과 한 몸 되어 이렇게 연미정 앞에 이르러 바다가 되었다. 한 줄기는 교동 쪽으로 흐르고 한 줄기는 남으로 꺾어 흐른다. 물줄기 갈라짐이 제비 꼬리 같다고 해서 제비 연, 꼬리 미를 써서 연미정(燕尾亭)이라고 했다.
남쪽으로 꺾여 흐르는 물줄기를 강화해협이라고도 하고 염하라고도 한다. 난 그냥 어릴 적부터 부르던 ‘가꾸지 바다’가 좋다. 갑곶→갑고지→갑구지→가꾸지다. 조선왕조실록은 염하를 ‘갑곶진 전양(甲串津前洋)’, ‘갑곶 전양(甲串前洋)’ 등으로 표기했다. 갑곶 앞바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니 의미도 모르고 부르던 ‘가꾸지 바다’의 역사가 꽤 긴 셈이다.
오늘은 가꾸지 바다 따라 내려가는 역사 산책길이다. 연미정, 강화전쟁박물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까지 가본다.
연미정이 언제 처음 지어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 이미 존재했다. 대몽항쟁기 강화 도읍 시절에 고종 임금이 여기에 왔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묘호란 때 강화로 피란했던 인조 임금도 연미정에 왔었다.
연미정에서 주변을 두루 살피던 인조가 물 건너 나루에서 강화로 향한 배를 보았다. 아마도 피란민을 태우고 김포 보구곶 쯤에서 출발한 배일 것이다.
인조가 정색하고 물었다.
“왜 강화로 들어오는 나루를 막지 않은 것이냐?”
부체찰사 김류가 대답했다.
“막았었는데 백성들의 원성이 심하여 풀었습니다.”
그랬더니 인조가 명령한다.
“앞으로는 백성들이 강화로 건너오지 못하게 막아라.”
김류가 되묻는다.
“살자고 강화로 피란하는 백성들을 어찌 막습니까?”
인조의 대답이 이러했다. “일이 위급한데 어찌 작은 폐단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아, 어찌 백성의 목숨이 작은 폐단이란 말인가! 아, 인조….
연미정에서 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이 전쟁 끝내는 화친조약을 맺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두 나라 사람들이 만났던 것은 사실이나 조약을 맺은 곳은 아니다. 최종적인 조약 체결 장소는 강화도호부 관아였던 것 같다. 지금의 고려궁지 주변이다.
도호부라고? 유수부가 아니고?
조선시대 강화의 수령 명칭을 정리해보고 가자. 조선 전기에 강화는 행정구역상 강화도호부였다. 줄여서 강화부라고 했다. 이때 수령을 도호부사, 줄여서 부사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광해군 때부터 강화도호부의 수령을 부윤으로 칭했다.
정묘호란(1627) 이후 인조는 강화도호부를 강화유수부로 올렸다. 수령 강화부윤은 강화유수로 불리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말을 줄여서 쓰길 좋아한다. 강화유수부를 흔히 강화부라고 했다. 그러니까 조선 전기의 강화부는 강화도호부요, 조선 후기의 강화부는 강화유수부를 가리키는 것이다.
<강화도 지방관 명칭 변경 과정>
행정구역 | 강화도호부 | 강화유수부 | |
지방관 | 도호부사(부사) | 부윤 | 유수 |
품계 | 종3품 | 종2품 | 종2품(병인양요 이후 정2품) |
조선시대 유수부는 강화 외에 개성, 수원, 광주(경기도)에 설치됐다. 기본적으로 한양을 보호하는 군사적 기능을 했다. 흔히 강화유수를 오늘날의 강화군수와 비슷한 급으로 설명하지만, 사실 위계 차이가 크다. 조선시대 군의 군수는 종4품이다. 강화유수가 종2품(정2품)인데 사헌부 대사헌도 종2품이다. 이조판서 등 6조판서가 정2품이다. 그러니까 강화유수는 지금의 장관급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연미정 마을은 대단히 번화했다. 저 아랫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수많은 상선과 세금 실은 배들이 연미정 포구에 정박해서 물때를 기다렸다. 자연스레 상당한 상권이 형성돼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깃배 한 척 나다니지 못하는 현실, 촘촘한 철책, 남북 분단의 현장임을 확인할 뿐이다.
연미정에서 내려오며 보니 왼쪽 공간에 검은색 비석이 있다. 가보자. 莊武公黃衡將軍宅地碑(장무공황형장군택지비)라고 새겼다. 여기에 황형 장군의 집이 있던 터임을 알리는 비이다. 임금이 이 지역 땅을 황형에게 하사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차로 5분여 거리에 황형의 묘가 있다. 강화산업단지 근처이다. 장무(莊武)는 황형(1459~1520)의 시호이다. 시호 뒤에 ‘공’을 붙여 장무공으로 부른다.
시호는 업적이 두드러진 신하나 학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라에서 내리는 명예로운 호칭이다. 이순신 장군의 시호는 충무이다. 그래서 충무공(忠武公)이다. 우리는 충무공, 그러면 무조건 이순신을 떠올리지만, 조선시대에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이들이 여럿이다. 김시민, 남이, 정충신 등의 시호도 충무이다. 그들도 충무공으로 부른다.
고려 말부터 속 썩이던 왜구의 침략이 조선 들어서도 끊이지 않았다. 아니 되겠다, 왜구의 뿌리를 뽑자! 조선 초에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1419년(세종 1) 이종무가 이끈 조선군은 대마도를 휩쓸어버렸다. 이제야 왜구가 잠잠해졌다.
조선 조정은 일본과 교류를 끊었다. 그러자 왜인들이 간절하게 빌었다. 교역을 간청했다. 조선은 그들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삼포(부산포, 제포, 염포)를 열어 그곳에서 장사하며 살게 해주었다. 그랬는데, 삼포에서 왜인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대마도에서 아주 많은 왜군이 와서 삼포의 왜인들과 합류했다. 사실상의 전쟁이었다. 조선의 위기를 누가 극복할 것인가? 1510년(중종 5), 중종의 명을 받은 황형 장군이 내려가서 삼포왜란을 진압했다.
황형은 삼포왜란 진압 후 대마도 정벌을 주장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실행되지 않았다. 은퇴한 후 고향 강화에 내려와 살면서 연미정 주변에 소나무 수천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대마도까지 짓쳐들어가지 못한 게 한이 되었을까, 앞날을 예견한 걸까.
맨날 밖에 나와 나무 심는 황형에게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황형의 답변, “후세에 알게 될 것이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강화에 주둔한 의병장 김천일 등은 황형이 심었던 소나무로 배를 만들어 왜군에 맞섰다고 한다.
강화문화원, 《江華文化》16,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