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에 진·보가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효종 때입니다. 해안 경계부대인 진과 보에 일종의 초소인 돈대가 들어서게 되는 것은 숙종 때입니다. 각 진·보는 돈대 몇 개씩을 맡아 운영하게 됩니다.
강화 해안에 설치한 돈대는 다해서 54개입니다. 오랜 기간 추가로 설치되면서 54개에 이른 것이고, 중간에 폐지된 돈대들도 있어서 항상 54개가 운영된 것은 아닙니다.
1679년(숙종 5)에 병조판서 김석주의 주도로 월곶돈대 등 48개 돈대가 설치됐습니다. 승군(僧軍) 8,900명이 동원되어 돈대의 몸체 부분을 쌓았고, 승군과 교대해 들어온 어영군 4,262명이 여장을 쌓고 마무리했습니다. 돈대 쌓는데 약 80일 정도 걸렸습니다. 채석 기간까지 포함하면 대략 6개월이 소요된 공사였습니다.
이후 숙종 대에 검암돈대(선수돈대)·빙현돈대·철북돈대·초루돈대가 추가됩니다. 그러니까 총 54개 돈대 가운데 52개가 숙종 때 세워진 겁니다. 여기에 영조 때 하나, 고종 때 하나가 더해져서 54개 돈대가 되었습니다. 1726년(영조 2)에 작성돈대가 설치되고, 1867년(고종 4)쯤에 용두돈대가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표를 통해 진·보와 돈대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강도지》와 《강화부지》의 진·보 소속 돈대 현황을 비교한 것입니다.
<진·보·돈대의 변화>
《강도지》, 1696(숙종 22) | 《강화부지》, 1783(정조 7) | |||
진보 | 소속돈대 | 진보 | 소속돈대 | |
1 | 월곶진 | 적북, 휴암, 월곶, 옥포 | 월곶진 | 적북, 휴암, 월곶, 옥창(옥포) |
2 | 제물진 | 망해, 제승, 염주, 갑곶 | 제물진 | 망해, 제승, 염주, 갑곶 |
3 | 용진진 | 가리산, 좌강, 용당 | 용진진 | 가리산, 좌강, 용당 |
4 | 광성보 | 광성, 손돌항 | 광성보 | 화도, 오두, 광성 |
5 | 덕진진 | 덕진 | 덕진진 | 손석항(손돌목), 덕진 |
6 | 초지진 | 초지, 장자평, 섬암 | 초지진 | 초지, 장자평, 섬암 |
7 | 화도보 | 화도, 오두정 | 선두보 | 택지, 동검북(소검도), 후애 |
8 | 장곶보 | 북일, 장곶, 검암 | 장곶보 | 미곶(미루지), 북일곶, 장곶, 검암(선수) |
9 | 정포보 | 건평, 망양, 삼암, 석각 | ||
10 | 인화보 | 인화, 광암, 구등곶 | 인화보 | 무태, 인화, 광암, 구등곶, 작성 |
11 | 철곶보 | 초루, 불장, 의두, 철북, 천진 | ||
12 | 승천보 | 석우, 소우, 숙룡, 낙성 | 승천보 | 석우, 빙현, 소우, 숙룡, 낙성 |
택지돈장 : 택지, 소검도, 후애, 양암 갈곶돈장 : 갈곶, 분오리, 송곶, 미곶 송강돈장 : 송강, 굴암, 건평 망양돈장 : 망양, 삼삼암, 석각 계룡돈장 : 계룡, 망월, 무태 불장돈장 : 불장, 의두, 천진 |
영문소속 | 분오리, 송곶, 송강, 굴암, 계룡, 망월 | ||
비고 | 갈곶돈대, 양암돈대 폐지 1718년(숙종 44) |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초지진은 변화가 없습니다. 선원면에 있던 화도보가 폐지되면서 화도보 소속인 화도돈대와 오두돈대가 광성보에 속하게 됐네요. 광성보에 속했던 손돌목돈대는 덕진진 소속으로 바뀌었고요. 신미양요 때 미군과 결전을 치른 광성보 손돌목돈대가 사실은 덕진진 소속이었습니다.
선두보가 새로 설립되면서 택지돈대장이 관리하던 택지돈대, 동검북돈대, 후애돈대를 맡게 됩니다. 장곶보는 갈곶돈대장이 맡았던 미곶돈대(미루지돈대)를 추가로 받았습니다. 새로 12진·보에 편입된 정포보는 송강돈대장과 망양돈대장이 관리하던 건평돈대, 망양돈대, 삼암돈대, 석각돈대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인화보는 계룡돈대장 소속인 무태돈대와 1726년(영조 2)에 추가 설립된 작성돈대를 받았습니다. 철곶보는 불장돈대장이 관리하던 불장돈대, 의두돈대, 천진돈대를 그대로 받고 또 1719년(숙종 45)에 세운 철북돈대와 1720년(숙종 46)에 세운 초루돈대까지 맡게 됩니다. 승천보는 기존 소속 돈대에 1718년(숙종 44)에 세운 빙현돈대를 더해서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강화부지》에 따르면, 진·보가 아닌 영문에 소속된 돈대들이 있습니다. 분오리, 송곶, 송강, 굴암, 계룡, 망월돈대입니다. 영문, 그러니까 진무영에 직속된 돈대들입니다. 흔히 설명하기를, 이들 돈대가 워낙 중요해서 진·보에 소속시키지 않고 진무영에서 직접 관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적절한 설명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시 중시한 돈대들은 강화도 동쪽 해안에 있었어요. 분오리, 송곶, 송강, 굴암, 계룡, 망월돈대는 외침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남쪽 해안과 서쪽 해안에 있습니다. 처음부터 진·보에 소속되지 않고 돈장들이 관리하던 곳입니다. 아마도 인근 진·보가 거리 문제 등을 들어 이들 돈대를 맡으려고 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영문 소속으로 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속 돈대가 늘어날수록 그만큼 관리 부담이 커지는 것이니까요.
1718년(숙종 44)에 갈곶돈대와 양암돈대를 폐지했다고 했습니다. 힘들게 만들어놓고 왜 폐지했는지 그 사정을 알아보겠습니다. 강화유수 권성이 임금에게 글로 아룁니다.
선두포 좌우에 갈곶돈과 양암돈이 있는데, 둑을 쌓아 개간하면서 두 돈대 주변 지형이 바뀌었습니다. 진흙뻘이 드넓게 형성되어 큰 배의 출입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적선의 상륙이 불가하게 되니 두 돈대의 필요성이 사라졌습니다. 그대로 유지해야 할지 혁파해야 할지 중신(重臣)을 보내셔서 살펴보고 결정하게 해주소서. 《숙종실록》
두 돈대가 폐지된 것은 선두포 간척의 결과입니다. 민진원 유수 주도로 선두포에 둑을 쌓은 것은 1707년(숙종 33)입니다. 바다를 막으면서 물 흐름이 바뀌었고 그래서 갈곶돈대와 양암돈대 앞으로는 큰 배가 들어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적선이 상륙할 가능성이 없는 곳에 굳이 돈대를 운영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죠.
숙종은 유수의 뜻에 따라 비변사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비변사에서 대답하길, “양암과 갈곶을 혁파하는 문제는 이미 전부터 논의되어 온 것입니다. 따로 중신을 파견하여 간심(看審, 자세히 살핌)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무조건 폐지하자는 얘기입니다. 숙종이 따랐습니다. 결국, 설치된 지 40년만인 1718년(숙종 44)에 와서 두 돈대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입니다.
민진원 유수가 선두포 축언이 왜 필요한지 숙종에게 아뢰면서 이런 말도 했었습니다.
“선두포의 양쪽 가에 양암과 갈곶 두 돈대가 있는데 서로의 거리가 3백여 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포구의 물이 중간에서 막혀 서둘러서 왕래하려면 20리의 원거리가 되니 만약 그 제방을 쌓으면 20리를 3백 발로 줄일 수가 있어 방수하는 도리에도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비변사등록》
둑을 쌓으면 양암돈대와 갈곶돈대 군사들이 서로 쉽게 왕래하고 연락해서 방수에도 편리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둑 쌓으면, 두 돈대가 필요 없게 될 거라는 걸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개발은 예상하지 못한 자연의 변화를 동반합니다. 때로 인간 삶에 커다란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폐지했다고 해서 돈대 시설을 바로 없앤 것은 아닐 겁니다. 지키는 군사도 무기도 없는 상태로 방치되면서 지금에 이르렀을 겁니다. 현재 두 돈대의 터가 남아 있습니다. 돈대를 이루고 있던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돌들이 여전히 돈대 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폐지된 돈대가 양암·갈곶, 둘로 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실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옛 지도를 통해 추정이 가능합니다. 돈대 현황을 상세히 그린 〈강화부전도〉(1872)는 폐지된 돈대를 아예 표기하지 않았는데요, 양암·갈곶돈대와 함께 빙현돈대도 그려 넣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빙현돈대가 폐지됐음을 알려줍니다.
〈강화부전도〉 조금 뒤에 제작된 〈강도부지도〉(1875~1894, 서울대도서관)는 빙현돈대에 ‘今廢’(금폐, 지금은 폐지)라고 적었습니다. 더해서 택지돈대와 무태돈대도에도 ‘今廢’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빙현돈대가 폐지되고 몇 년 뒤에 택지돈대와 무태돈대까지 폐지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중도 폐지된 돈대는 양암돈대, 갈곶돈대, 빙현돈대, 택지돈대, 무태돈대, 이렇게 다섯이 되는 셈입니다.
강화 본섬 밖에 있는 유일한 돈대, 동검북돈대. 이 돈대는 좀 애매합니다. 언젠가 돈대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만, 이후 일종의 봉수대로 쓰였습니다. 폐지라고 할 수도 있겠고, 용도 변경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강화투데이〉 2023년 12월 30일, 제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