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史 81

장가간다는 말의 숨은 의미는

고려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유산 상속을 하지 않고 돌아가신 모양이다. 자식들이 모여서 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나누는데, 문제는 노비였다. 노비도 재산으로 취급되던 시대다. 건강한 노비, 병약한 노비, 젊은 노비, 늙은 노비. 공평하게 나누기가 어렵다. 누군들 병약하고 나이 많은 노비를 택하고 싶겠는가. 아들, 딸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드디어 방법을 찾았다. 어떤 방법?제비뽑기였다. 자식들은 제비뽑기로 노비들을 분배했다. 딸도 노비를 받았다고? 그렇다. 고려시대에는 유산 상속에 딸, 아들 차별이 없었다(이 과정에서 노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고통을 겪기도 했을 것이다). 아버지 제사도 아들, 딸이 같이 모셨다. 만약 아들 없이 딸만 있다면? 당연히 딸들이 제사를 지냈다. “장가..

❚ 史 2024.04.26

강화 역사와 강화문학관

다시, 봄입니다 꽃이 피었다고 봄이 아닙니다. 저에게 봄날은 내복 벗은 날, 비로소 시작됩니다. 이제 벗었으니 진짜 봄입니다. 봄맞이 관광객이 강화로 많이들 들어옵니다. 그래서 휴일이면 교통 체증이 심해집니다. 어디 좀 가려면 차가 막혀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럼, 운전대 잡고 혼잣말하게 되죠. “뭘 볼 게 있다고 이렇게들 내려오나.” 우리 눈엔 볼 게 없을 수 있습니다. 너무 익숙한 일상의 환경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외지에서 강화를 찾는 이들에겐 산, 바다, 갯벌이 다 멋진 볼거리입니다. 설사 볼거리가 없다 해도 여전히 강화는 매력적인 여행지입니다. 서울도 아니고, 김포 장기동 사는 친구가 그러더군요. “강화대교 건너는 순간 코가 뻥 뚫려.” 진짜 그러냐, 기분에 그런 거 아니냐? 물어봤더니 진짜..

❚ 史 2024.04.15

[스크랩] ‘학자 군주’ 노무현

노무현 대통령 시기에 청와대에서 일한 이정우의 〈참여정부 천일야화〉가 한겨레에 연재되고 있다. 60화 에필로그(2024.04.02.)의 한 대목을 옮긴다. 캐리커처는 매일신문(박상철 일러스트레이터)에서 옮겨왔다. 장례식 날 나는 한겨레신문에 추도문 ‘학자 군주 노무현을 그리며’를 썼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익보다 정의를 추구했다.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찾아가자 혜왕이 물었다. “선생께서 불원천리 찾아오셨으니 우리나라에 큰 이익을 주시겠지요?” 맹자가 답했다.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그렇다. 노무현은 평생 이익 대신 정의를, 약자에 대한 배려를 앞세웠다. 늘 손해 보고 지는 길을 갔다. 노무현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말실수와 학벌을 든다. ..

❚ 史 2024.04.02

고려궁지와 강화유수부

명위헌과 이아 1231년(고종 18), 몽골의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됩니다. 다음 해인 1232년(고종 19)에 고려 조정은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깁니다. 6월 17일에 강화 궁궐 공사가 시작됩니다. 고종이 개경을 떠난 날은 7월 6일, 강화에 도착한 날은 7월 7일입니다. 궁궐 조영이 시작된 지 스무날 정도밖에 안 됐을 때입니다. 당연히, 궁궐이, 없습니다. 임금 고종은 어디로 가야 하나. 객관(客館)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강화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궁궐이 제대로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은 1234년(고종 21)쯤이었습니다. 새로운 도읍, 강화도에 새로운 궁궐이 들어선 것입니다. 지금, 고려궁궐은 없고요, 궁궐터만 전합니다. 우리는 이곳을 고려궁지(高麗宮址)라고 부릅니다. 고려궁지 계단 올라 ‘昇平門..

❚ 史 2024.04.02

강화읍내 역사산책③ - 강화산성

오래전, 고려 대몽항쟁을 다룬 책을 준비할 때였다. 전국의 이름난 항쟁지를 거의 다 답사했다. 전라남도 장성군 입암산성에 갔을 때다. 얼추 시간 따져보니 해가 지기 전에 산성 돌아보고 사진 찍고 내려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차하고 바로 입산 시작. 점점 오가는 등산객이 줄어들었다. 깊이 들어갔다. 사람이 없다. 길을 잃었다. 아직 해질 시간이 아닌데 어둡다? 그때야 내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음을 알았다. 벗으니 환하긴 한데 앞이 안 보였다. 시력이 지독히 나쁘니 당연한 일. 차에서 내릴 때 선글라스 벗고 안경을 쓰고 왔어야 했다. 벗을 수도 쓸 수도 없는 상황. 사위가 컴컴해지고 우두망찰 주저앉은 나는 울고 싶었다. 목이 말랐지만, 물병도 없이 왔다. 나무뿌리에 채고 돌부리에 채면서 겨우겨우 내려왔다. ..

❚ 史 2024.03.22

강화읍내 역사산책② - 성공회 강화성당

자 이제, 성공회 성당으로. 층계 위로 솟을삼문 모양의 대문,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더 웅장하다. 층계 좌우에 쇠 난간부터 보자. 별거 없다. 그런데 왜? 일제강점기 후반 일제는 대대적으로 쇠붙이 징발에 나섰다. 녹여서 무기 만들려는 거다. 학교 교문 떼어 가고, 집안의 가마솥 뜯어가고 놋그릇 집어가고, 산속 사찰의 종까지 가져갔다. 성공회도 피해를 보았다. 계단 난간을 뜯겼다. 일본인 신자들이 강화성당에 왔다가 그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선조들의 잘못을 사죄했다.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난간 설치 비용을 보내왔다. 그렇게 설치된 난간이다(2010). 일본인도 일본인 나름이다. 혐한증 환자만 있는 게 아니다. 문 열고 들어서니 왼편에 높이 150㎝ 정도의 아담한 종이 걸렸다. 한국식 동종이다. 원래 영국에서..

❚ 史 2024.03.22

강화읍내 역사산책① - 용흥궁

조선 철종의 이름은? 원범! 이원범이다. 원범을 아시는 분은 연령이 육십 세 내외일 것이다. 그 세대가 어릴 때 인기 있던 TV 드라마가 ‘임금님의 첫사랑’이다. 주인공은 원범이, 그의 첫사랑은 양순이였다. 강화에 귀양 온 원범이가 어느 날 갑자기 철종으로 즉위한다. 강화도에 남은 양순이를 그리워하며 애태운다. 참 재밌었다. 주제가도 유명했는데 가사가 이쁘다. 강화섬 꽃바람이 물결에 실려 오면 / 머리 위에 구름 이고 맨발로 달려 나와 / 두 마리 사슴처럼 뛰고 안고 놀았는데 / 갑고지 나루터에 돛단배 떠나던 날 / 노을에 타버리는데 임금님의 첫사랑 … “두 마리 사슴처럼 뛰고 안고 놀았는데” 사극은 재미있을수록 부작용도 크다. 역사를 소재로 ‘만들어진’ 극이다. 거기 나오는 내용이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 史 2024.03.22

‘나제통문’과 만들어진 역사

전북 무주에 돌산을 뚫은 통문이 있다. 구천동 33경 가운데 제1경 나제통문(羅濟通門)이다. 신라와 백제가 통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이름 속에 국경 관문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삼국, 그 시대쯤에 뚫은 문으로 말해진다. 하지만, 아니라고 한다. 돌산을 뚫어 이 문을 낸 때가 일제강점기 1920년대라고 한다. 삼국시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동네 사람들은 오래도록 ‘기니미굴’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무주구천동을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1960년대에 ‘기니미굴’을 ‘나제통문’으로 이름 바꿨다. 33경 각각에 대한 작명도 그때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제 무주구천동은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관광지가 되었다. 당시 구천동 계곡 관광지 개발 사업에 참여했던 오재성이 2018년에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와 인터뷰했다. “가난했으니..

❚ 史 2024.03.19

향교와 서원 그리고 충렬사

향교 이야기 지난 57호에서 충렬사의 성격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충렬사 수직방과 전사청에 관해 조금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전에 향교와 서원의 개념과 건축 구조부터 검토할게요. 충렬사와 비교하기 위함입니다. 향교(鄕校)를 한마디로 풀이하면 옛날 학교입니다. 고려시대에 처음 생겼습니다. 강화향교와 교동향교가 세워진 것도 고려시대입니다. 고려를 이어 조선의 지방 학생들도 향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서울에는 향교가 없어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 “경향 각지에서 모이다.” 이런 표현이 있지요. 경향(京鄕)은 서울과 지방, 서울과 시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향교는 향(鄕, 지방)에 있는 학교(校)라는 의미입니다. 조선의 경우 한양 학생들은 4부학당(四部學堂)에서 공부했습니다. ‘서울에 지금 양천..

❚ 史 2024.03.15